◎“죽으면 죽었지 일에 당할 수는 없었지…”/18세때 방적공장 파업 주도로 투옥/독립자금 모으다 이육사와 또 수감/“내 인생 망가졌지만 결코 후회없어”『내 젊음을 앗아간 저 담장이 그때는 왜 그리 높아만 보였는지…』
광복 51주년을 맞아 15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게 된 여성 독립투사 이병희씨(77·서대문구 창천동 53의 76). 그는 일제하에서 뼈저리게 느낀 나라 잃은 설움과 당시 수감생활의 고통을 이야기했다.
『나라를 빼앗긴 설움으로 방적공장 파업에서 선봉에 나섰지만 열여덟 나이에 감옥생활은 너무나 괴로웠어. 동지들은 저 뒤편 사형장에서 하나하나 죽어 나갔지』
이씨가 악명높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것은 37년 4월. 독립운동가였던 아버지 이경식씨(45년 작고)의 말에 따라 당시 일인이 운영하던 종연방적회사에서 파업을 주도했다. 6백여명을 파업에 참여시킨 파업 주동자는 그러나 형무소에서 3년6개월을 보내야했다. 고춧가루물을 코로 들이붓는 모진 고문을 당하며 인고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출소후 북경(베이징)에서 뜨개질로 독립투사들의 군자금을 모으던 시절 저항시인 이육사(본명 이원녹)와 만났다. 항렬로 치면 할아버지뻘인 육사는 『중경(중칭)으로 건너가 총을 들고 싸워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1주일후 이씨는 정탐원의 밀고로 체포돼 육사와 함께 베이징 형무소에 수감됐다. 육사는 모진 고문을 당해 4개월여만에 옥사했고 이씨는 시신을 수습해 유골을 고국에 보내고 3년뒤 귀국했다.
『두번의 감옥생활로 내 인생은 망가졌지만 결코 후회는 없어. 죽으면 죽었지 일본인의 노리개는 되지 않겠노라고 외치던 시절이었어. 나라가 나를 잊지 않고 이렇게 훈장까지 준다니 그저 고마울 뿐이지』
암울했던 그시절을 회상하는 이씨의 주름진 눈가는 물기로 젖어있었다.
아버지도 이번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게 돼 더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이씨. 연세대 부근 단독주택에서 건설업을 하는 아들 조영철씨(43)와 함께 살고있는 그는 올 가을 아버지 유해를 찾아 중국과 몽골에 다녀 올 작정이다.<김관명 기자>김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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