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올로기가 끝난 자리에 「인간」이…/파시즘의 시대에 카프는 파산하고/사실의 문학 건설 추구한 유진오는 고민없는 신세대를 “불순하다” 비판/김동리는 “인간존재 자체가 순수” 반박객:어째서 1930년대가 그토록 중요한가. 대학 국문과의 석·박사논문의 거의 대부분이 이 시대에 집중되어 있지 않습니까. 민중의식의 시대인 70∼80년대에도 그러했는데, 카프문학 때문이었지요. 그 점은 쉽사리 이해되는데, 탈이데올로기 시대로 접어든 90년대에 와서도 여전히 그러한 이유는?
주:저라면 이렇게 질문하겠습니다. 「역사는 과연 되풀이되는 것일까」라고. 「마르크스의 후퇴란 역사의 종언에 해당되는 것인가」라고.
객:헤겔은 나폴레옹의 예나 침공때 역사의 끝장을 보지 않았습니까. 프랑스혁명의 이념(자유민주주의)이 전유럽을 균질화시켰으니까. 그 직계 A 코제브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또 1989년 냉전의 종식에서 F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언을 선언하지 않았던가. 만일 이러한 인식체계에 따른다면, 나폴레옹 이후에 시작된 역사란 무엇인가. 또 그것이 끝장나고 나서 시작된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가 끝장나고 다시 시작된 것도 역사축에 드는 것일까. 가짜 역사일까. 한 사이클이 끝나고 똑 같은 사이클이 되풀이되는 것일까.
주:헤겔의 논법에 따른다면, 역사(인간)란 주인·노예의 변증법(「정신현상학」)에 따라 전개되는 것인 만큼 제1차, 2차 세계대전도 그러한 양상에 지나지 않는 것. 계급투쟁도 마찬가지. 그렇다면 역사의 종언 이후 새로 전개되는 역사란 어떤 것일까.
객:그야 되풀이겠지요. 이 점에서 후쿠야마는 분명하더군요. 대등원망이 아니라 우월원망(주인, 노예)이 부드럽게 적용되는 그런 역사 아니겠습니까. 인간의 자존심(thymos, 기개)을 내세우고 있으니까.
주:만일 새로 시작되는 역사가 반복이 아니라 최후의 역사라면 어떻게 될까. 니체가 본 일체의 투쟁에서 해방된 인간이란, 안일에 빠진 인간 말종이겠고, 코제브가 본 것은 물질적 충족 속에 안주하는 동물형(미국)이거나, 무의미한 형식의 반복과 세련에 몰두하는 인간형(일본)이겠고.
객:가설에 지나지 않겠지요.
주:물론. 그러나 역사가 끝장났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음도 사실 아니겠는가. 포퍼 식의 반증이 불가능하여 과학적 답변은 못된다 할지라도 이런 의문을 품는 것이 지적 성실성이 아닐까요.
객:알겠습니다. 선생 식으로 말하면 근대의 초극론. 근사한 문제 제출이 소중하다는 것이겠군요.
주:전주사건(1934.6∼1935.12)과 카프의 해산(1935.5)은 카프 내부에서 발생한 카프해소파, 비해소파, 태도유보파 등의 구별을 없애버렸다고 볼 것인데, 파시즘의 등장으로 세계사의 재편성이 눈 앞에 전개되고 있지 않았던가. 소련이 독일과 불가침조약(1939)까지 체결하였으며, 천황제 군국주의 일본이 독일, 이탈리아와 기축국을 형성(1940)한 마당이 아니었던가.
객:스페인 인민전선(1936∼37)이 파시스트에 의해 여지없이 무너진 사건 또한 카프문인들에겐 충격적이었을 테지요. 사회민주주의(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자본주의)의 연합전선이란 한갓 환상이었음이 여지없이 증명된 셈이니까. 「서구의 몰락」(슈펭글러)이 제기되고, 「20세기의 신화」(로젠베르크)가 불어 닥쳤을 때, 이를 야만주의(Vandalism)라 규정, 지성옹호 문화방위 국제대회를 개최한 P 발레리, A 지드의 몸짓도 한갓 약자의 변명으로 보이지 않았을까. 셰스토프의 불안철학이 콜레라처럼 번져간 것은 이로 보면 실로 자연스런 유행이라 할 수 없을까.
주:과학으로서의 유토피아사상인 마르크스주의가 파시즘의 등장으로 상대화했을 때, 그 신봉자들 대부분이 역사에 대한 회의에 빠지지 않았겠는가. 역사의 종언의식이 그것.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탄압의 강화는 그러한 종언의식을 더욱 확실한 것으로 만들지 않았을까. 마르크스주의를 절대적인 진리로 믿었던 상황에서 한 단계 내려와 자본주의, 파시즘 등과 견줄 정도의 상대화로 전락하지 않았겠는가.
객:역사의 종언의식의 근거는, 절대적 신념의 상실감으로 요약되겠군요. 몸에 기름을 붓고 불을 댕기어 옥상에서 뛰어내릴 만큼 대단했던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끝장난 90년 이래의 오늘날의 상황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러니까 이데올로기라든가 역사란 것도 상대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대충 이런 문제의식이겠는데….
주:이른바 경도학파가 창안해 낸 「근대의 초극론」에 일단 주목할 필요가 없을까. 자본주의가 근대의 중심축이라 본다면 근대의 초극이란 바로 자본주의의 초극이라 볼 것이지요. 그 다음 마르크스주의가 근대의 또 다른 중심축이라면 근대의 초극이란 이것의 초극이라 할 것이지요. 이 두 기둥을 초극한다면 무엇이 남는가. 근대 이전의 세계, 곧 신화로 복귀하는 것이 그 하나. 다른 하나는 이른바 종이론. 세계를 몇 개의 블록으로 나누어야 한다는 것 등등.
객:「만엽에로 돌아가자!」라는 구호와, 대동아공영권이 그것이겠군요. 그러고 보니 근대의 초극이란 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연상할 법도 하군요. 동남아경제권을 한 손아귀에 쥔 오늘의 일본경제력이 대동아공영권에 대응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주:카프문학의 퇴조랄까 그 내면화를 가운데 둔 논의가 30년대 우리 문학의 넓이와 깊이라고 저는 봅니다. 결국 그것은 근대와 그 초극론 범주 속에 수렴되기 때문이지요.
객:유진오와 김동리의 대결 말입니까. 「유진오, 김동리란 고유명사가 아니다」라는 명제를 선생은 되풀이해 오지 않았던가요. 「근대와 반근대」 또는 「근대와 비근대(몰근대)」의 도식이 그것 아닙니까.
주:유진오라면 서울토박이이자, 개화기사상의 가장 깊은 뿌리를 가진 집안(그의 부친은 일본 유학 출신. 구한말의 고급관료, 법관) 출신. 또한 경성제대의 제1회 입학생이자 수석합격자. 이 법학도이자 사회과학도는 또한 동반자작가이기도 했지요. 「김강사와 T교수」(1935)는 전주사건으로 공백기에 놓였던 카프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이었던 것.
객:그렇다면 지식인 중의 지식인이자 작가인 유진오가 역사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에 조선지식인의 뭇 시선이 집중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조선문학에 주어진 새 길」(1939.1)이 바로 유진오의 문제적 글. 신문학이 시작된 지 30년의 시간이 흘렀다는 것. 이 30년이란 의미심장하다는 것. 왜냐면 한 시대의 종말단위인 까닭. 인간의 세대단위도 이에 대응된다는 것. 일본 사상계의 동향에 극히 민감한 그는 신화로 도피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사실을 직시함에서 출발합니다. 발레리가 말하는 「사실의 세기」에 공감했다고나 할까.
객:그게 이른바 시정의 리얼리즘입니까.
주:사실의 문학은 어떻게 해서 건설할 것인가, 이렇게 스스로 물은 그는 (1)이상형의 세계에서 탈출하여 넓은 속물의 세계로 산보를 나설 것 (2)속물의 세계를 예술의 경지에까지 고양시킬 것을 내세웠지요.
객:섣불리 직관이나 예언이나 신화(고대의 꿈, 민족의식 따위)의 유혹에 빠지지 말고 탈이데올로기(속물, 일상적 삶)에 주저 앉아 이를 예술적으로 형상화하기야말로 전형기에 대처하는 방식이라. 이론과 창작에서 표본을 보인 셈이라고나 할까. 아무리 그가 제일급 지식인이라도 유진오식 위기극복의 방법론으로 한정한다면 그만 아닙니까?
주:물론입니다. 아무리 대단한 유진오지만 그 개인의 견해니까. 김동리가 참지 못한 것은 따로 있는데, 유진오의 두 번째 글 「순수에의 지향」(1936.9)이 그것. 신세대와 기성세대 간엔 언어가 불통될 만큼 단절되었다는 지적까지는 상관없겠으나(세대론이란 응당 그러하니까) 문제는 유진오의 신세대비판에 있었던 것. 유진오는 신세대를 「불순하다」고 한 마디로 요약했습니다.
객:기성세대는 「순수하다」는 것입니까. 카프문학이 순수하고, 그것과 담을 쌓은 신세대는 불순하다?
주:「순수」란 무엇인가. 스스로 물은 유진오는 이렇게 적었지요. 「모든 비문학적인 야심과 책모를 떠나 오로지 빛나는 문학정신만을 옹호하려는 의연한 태도」라고. 별을 향한 행진에 불탔던 기성세대가 불행한 것은 이 시대가 그 행진을 불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라면 그러한 고민(인간성 옹호) 없이 출발한 신세대는 얼마나 행복한가. 기성작가들이 문학정신(순수)의 정당한 발전을 위해 악전고투했다면 신인에겐 그런 것이 없다는 것.
객:김동리의 반격이 「순수이의」(1939.8)이겠군요. 이데올로기에 치달은 기성세대야말로 「불순」하다? 탈이데올로기야말로 「순수」 아니겠느냐?
주:그렇게 단순치 않습니다. 중학 중퇴의 해인사파인 신인 김동리의 출발점은 그보다 훨씬 본질적인 지점입니다. 그 지점은 두 가지. 문인이라는 지점이 그 하나. 문인이라면 그 누구도 출발 당초부터 불행(순수)하다는 것. 왜? 표현이란 온 몸으로 달겨 들어도 도달키 어려운 과업이니까. 이데올로기라든가 탈이데올로기 따위보다 원초적인 지점이지요. 다른 하나는,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불행(순수)하다는 것.
객:….
주:김동리의 주장이 큰 설득력을 가졌던 것은 신세대 작가군의 작품들이 뒷받침하기 때문. 김동리의 「무녀도」(1936), 「바위」(1936), 「황토기」(1939), 서정주의 「화사」(1936), 최명익의 「비오는 길」(1936), 허준의 「야한기」(1938) 등이 그것.
객:세계의 리듬과 작가의 맥박이 일치될 때 진짜 리얼리즘(문학)이 탄생한다는 것. 그렇다면 주체성의 절대성이 아닐까요.
주:낭만주의자들의 독법이라면 그렇겠지요.
객:아, 알겠군요. 어째서 이것을 선생이 「근대의 초극」논쟁이라 부르게 되었는가를. (A)인간(알몸의 인간, 문둥이, 벙어리 등등)의 자리, (B)문인(신인, 기성 등)의 자리, (C)신인, 기성으로 구분된 자리(이데올로기의 유무) 등 세 가지 층위가 있다는 것. 이 중 김동리는 (B)에, 유진오는 (C)에 서 있다는 것. (C)가 근대라면 (B)는 전근대라는 것. (B)의 지척에 (A)가 있다는 것. 그러니까 김동리의 불행(순수)이란 문학이기도 하지만 종교이기도 하다는 것.
주:바로 보셨군요. 근대의 파산과 더불어 유진오는 파산할 수 있지만 근대가 파산하든 말든 김동리는 아무 영향도 입지 않지요. 전근대이자 초근대인 까닭. 해방공간에서 벌어진 좌우익논쟁에서 이 점이 새삼 확인될 수밖에.<김윤식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김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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