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망과 몰락 사이에 놓인 응시의 시학젊은 시인들의 시동인지인 「21세기 전망」 제5집은 「시의 몰락, 시정신의 부활」(김영사간)을 제호로 내걸고 있다. 우선, 「전망」에서 「몰락」을 보자니 이상타. 장미와 할미가 한데 뒤섞여 있는 것이다. 할미꽃은 안개꽃이 아니다. 그러니 장미꽃의 탈색, 전망의 음울한 추락을 볼 수 밖에 없는데 그런데도 「전망」이라는 단어는 완강한 버팀줄과도 같이 지면과 충돌해 부서지지는 않을 아슬아슬한 높이에 시를 계류시킨다. 이 제호는 대중적 전위주의를 내세운 동인들의 7년 동안의 작업이 꽤 힘겨웠음을 말해주기도 한다. 이들은 시의 역사가 문득 붙박힌 지점에서 출발하였다. 시가 생의 상징이기를 그치고 상상력을 읽어버린 아이들의 대리 낙서판으로 전락하기 시작한 시대가 그들의 때고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를 쓰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지 않으면 시의 몸도, 시의 뜻도 사라져버린다. 용불용설은 생물학 뿐만 아니라 문화에도 어김없다. 젊은 시인들은 전망과 몰락사이에서 시정신의 부활을 선언한다. 그 사이 아슬아슬한 높이는 오직 전망 너머로만 장밋빛 빛기둥을 쏘아올리는 문화산업의 레이더가 미치지 않는 맹점지대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시의 혼백이 몸을 되찾으려면 스스로 구조를 갖추지 않으면 안된다. 그 구조에 나는 「응시」의 시학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다. 모든 시는 생의 핵심을 꿰뚫어 보여주는 작업일지니, 사실 시선의 힘을 빌리지 않는 시는 없다. 하지만 시선들은 얼마나 다양한가? 불타는, 냉혹한, 홀린, 무심코 스치는 온갖 시선들. 응시는 이 시선들 다음의 시선, 시선들의 착종과 합류를 꿰는 시선을 말한다. 응시는 시선의 시선이다. 그것은 「쓸쓸한 가을이 지나고 봄이 와서도/ 향긋한 꽃내 가득 찼어도/ 그녀의 숨소리는 이 세상에 붙어있는 소리가 아니었다」 같은 구절에 압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얼핏 심상해 보이는 이 시구는 몰락하는 과거와 현재의 요란한 외관과 그것의 황량한 뒷면을 동일한 지각판에 한꺼번에 새김으로써 환각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이 작업의 이유는 명백하다. 시선은 항상 대상에 대한 욕망으로 들끓는데 뚫리지 않는 욕망은 겹겹이 갇혀버리기 때문이다. 이 감옥으로부터 탈출하려면 시선의 시원으로, 다시 말해 시의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작업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수다가 남긴 수많은 말의 뿌리들」을 파헤쳐 그것이 산삼인지 도라진지 검증해야만 하는 것이다. 덧붙이자면 시선의 뿌리로의 회귀는 희한하게도 소리를 낸다. 「새는 날개의 길을 울음소리로 가본다네」같은 구절이 가리키듯이 말이다. 하긴 시란 본래 노래아닌가? 박자와 선율에 대한 노력이 비상한 이 동인지가 나를 물음표 모양으로 굽어있게 한다. 그렇다 해도, 누가 투시인 시와 노래인 시를 하나라고 했는가?<정과리 문학평론가·충남대 교수>정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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