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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틀랜타올림픽­마라톤 은 이봉주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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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틀랜타올림픽­마라톤 은 이봉주 스토리

입력
1996.08.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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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50㎞ 지옥훈련 4년의 결실/고 1때 늦은 입문… 달리기 위해 전학까지/선천적 짝발 「유혈레이스」 일쑤/눈에 땀 못흐르게 쌍꺼풀 수술도황영조가 「몬주익의 쾌재」를 부르던 날(92년 8월10일) 밤 동갑내기 이봉주(26·코오롱)는 흥분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날밤 이봉주는 『올림픽에서 우승하는 그날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달리겠다』고 다짐했고, 다음날 곧장 하루 50㎞의 지옥훈련을 위해 강원도 횡계로 떠났다.

그로부터 4년. 96동아마라톤서 황영조를 누른 이봉주는 선발전서 탈락해 운동화를 벗은 황영조 같이 세계적인 마라토너가 됐다.

어려서부터 마냥 달리기가 좋았다. 『뜀박질해서 입에 풀칠이나 하겠냐』 『사서 하는 고생도 낙이 있어야제』 적지않은 부모의 만류. 하지만 막내아들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이봉주는 오로지 달리기를 위해 고등학교를 옮겼다. 천안농고 1학년때 처음 육상트랙을 밟았으나 지원부족과 팀해체로 광천고로 전학했다.

1백67㎝, 55㎏. 체력도 남달리 좋은 것이 아니다. 논 열마지기와 밭 서너마지기로 4명(2남2녀)의 자식을 키워 온 노부모(이해구·68, 공옥희·61)도 막내에게 『운동 열심히 하라』고 보약 한첩 지어줄 형편이 못됐다.

게다가 그는 짝발이었다. 왼발은 2백55㎜, 오른발은 2백50㎜. 오른발에 맞춰 2백50㎜ 운동화를 신었으나 조금만 달리면 왼쪽 엄지발가락이 피범벅이 됐다. 「짝발 콤플렉스」는 두고 두고 이봉주의 육상인생에 장애로 작용했다. 물론 이제 한국 최고의 마라토너가 된 그는 수억원짜리 「짝발 운동화」를 신고 달린다.

무명의 세월. 달리고 또 달렸지만 전국대회 중장거리부문에서 종종 명함을 내밀 정도였다. 달리는게 고통이라는 걸 알게 됐다.

비로소 90년 서울시청에 입단한후에야 정신적인 안정을 찾았다. 대학생활(서울시립대)도 누렸다. 실력이 조금씩 느는 걸 피부로 느꼈다.

90년 11월 제36회 경부대역전경주대회. 「이봉주」라는 이름이 육상인들의 뇌리에 아로 새겨졌다. 이 대회에서 자그마치 4차례나 소구간 우승을 차지, 최우수신인상을 받은 것. 88년 이 대회에서 똑같이 최우수신인상을 받은후 잘 나가고 있던 황영조 보다 2년 늦게 데뷔한 셈이다.

빛이 조금씩 보였다. 대학3년때인 92년 제4회 전국실업단대항 1만m서 1위, 5천m 2위. 92도쿄하프마라톤대회 한국신기록(1시간1분4초)으로 4위.

황영조의 올림픽 금메달로 모두가 들떠있던 92년 여름 이봉주는 마침내 마라톤에 뛰어들었다. 체력만 보강하면 중장거리로 다져진 스피드로 단박에 좋은 기록을 낼 것 같았다. 하지만 마라톤은 단순한 거리의 연장이 아니었다. 그해 대구전국체전이 데뷔무대. 2시간20분대의 초라한 기록으로 9위. 93년3월 벌어진 동아마라톤서도 12위.

그러나 이봉주는 말없이 내일을 준비했다. 93년 가을에는 마라톤도중 땀이 눈속으로 들어가는 부작용을 제거하기 위해 쌍꺼풀수술 마저 받았다. 그러나 수술이 제대로 안돼 「짝짝이 쌍꺼풀」이 돼버렸다.

쌓인 경력 만큼 차츰차츰 기량이 늘었다. 93전국체전 1위. 기록은 무려 10분여를 줄인 2시간10분27초. 그해 12월 찜통더위속에 벌어진 호놀룰루국제대회서 세계적 마라토너 코스마티 엔데티(케냐)를 꺾고 우승. 그리고 93년 11월 「독사」 정봉수 감독(코오롱)을 만나면서 그 힘은 배가됐다. 94보스턴마라톤서 9분대 기록으로 11위에 오르더니 94춘천마라톤서도 대회신기록(2시간9분59초)으로 정상에 우뚝 섰다. 95동아대회도 우승.

어느덧 이봉주는 황영조 김재룡 김완기의 트로이카 체제를 압도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올림픽의 해인 96년이 찾아오자 정감독은 『올 올림픽은 부지런한 봉달이 몫』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봉달이는 이봉주의 별명. 정감독의 말대로 이봉주는 「제몫」을 찾았다.<이동준 기자>

◎마라톤 조련사 정봉수 감독/경험바탕 선수선발 체계적 훈련/직접 개발 식이요법·음료수 “유명”

정봉수 감독(61)은 조련사다. 그가 없었다면 몬주익의 황영조도, 애틀랜타의 이봉주도 없었다. 2명의 제자를 올림픽마라톤 정상권에 올려 놓았다면 그 또한 금메달감임에 틀림없다.

1명도 아니고 2명의 정상급 마라토너를 만들어낸 정봉수 감독의 훈련방법은 철저히 경험적이다. 스포츠과학이란 다름아닌 여러가지 방법을 통해 선수에게 가장 적합한 훈련을 찾아내는 것이라는 게 정감독의 지론이다.

92년 올림픽때는 자신이 고안해낸 음료수(선수들이 달릴때 마시는)의 효능을 시험해보기 위해 남자선수들에 앞서 경기를 가진 여자선수들에게 먼저 먹여보았다는 일화는 그의 경험적 사고방식을 말해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의 선수발굴이나 훈련방법은 다 이런 식이다. 특별히 과학적인 것은 없지만 62년부터 지도자생활을 해온 그의 오랜 경험에서 자연스럽게 정립된 것이다.

그는 스카우트할 선수를 오랫동안 관찰하는데 가슴이 두껍고(황영조가 대표적인 예, 가슴이 두꺼운 선수는 심폐기능이 좋다고 한다) 다리근육이 매끈하게 빠진(지구력과 탄력이 좋다) 선수를 선호한다.

일단 그의 선택을 받은 선수는 집중훈련을 받는다. 주별훈련프로그램에 따라 도로인터벌, 산악, 트랙훈련을 반복한다. 이 프로그램에 따라 스피드 지구력 근력은 자연스럽게 배양된다.

경기전에는 그가 고안한 식이요법을 실시한다. 주로 대회 보름전부터 생수와 생선회를 소량으로 먹이며 대회가 가까워 지면서 생식과 찹쌀밥, 죽등으로 식사한다. 이러한 음식들은 달릴때 젖산분비를 촉진시켜 피로도를 줄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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