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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진의 「책 읽어주는 남자」(소설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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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진의 「책 읽어주는 남자」(소설평)

입력
1996.07.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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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층 삶과 유교 전통의 문제서하진의 창작집 「책 읽어주는 남자」(문학과 지성사간)에는 열 편의 중·단편이 실려 있다. 하나같이 고른 수준을 유지하는 그 작품 속에서 가장 많이 이야기되는 것은, 외관상 안정된 일상의 틀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 같지만 내면은 심각한 혼돈과 균열과 파탄의 징후에 끊임없이 시달리는 이 시대 중산층의 삶이다. 서하진이 적지않은 작품들에서 펼쳐 보이는 그 삶의 이야기들은 전체적인 구성과 세부적인 묘사 양면에서 고루 발휘되는 작가의 탄탄한 역량 덕분에 독자에게 쉽사리 잊을 수 없는 실감을 전달한다.

그러나 내가 창작집의 작품 중 가장 인상깊게 읽은 것은 자못 이채로운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중편 「조매제」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위세가 당당한 고관의 아들이요 본인도 현직 판사이니 시쳇말로 하자면 일등 신랑감에 다름 아닌데도 50차례 이상 선을 보았으되 혼처가 나서지 않는 처지이다. 그 중요한 이유는 그가 내로라 하는 양반가문의 종손으로 집안의 전통에 따라 4대 봉사를 하다보니 일년에 열다섯 번이나 제사를 지내는 처지라는 점이었다. 이 결혼문제만이 유일한 이유는 아니지만 중요한 이유의 하나로 작용해 문중회의에서 4대 봉사를 2대 봉사로 간소화하는 한편 조상의 위패를 시골에서 서울로 옮기기로 결정이 내려진다. 이런 마당에, 그토록 양반을 따지는 가문에서, 특별한 의식이 없을 수 없다. 그 의식이 바로 「조매제」이다. 작가는 이렇게 해서 베풀어지는 조매제의 모습을 정밀하게 묘사하는 한편 주인공의 가문이 지난 몇 대 동안 살아온 이력과 주인공 자신이 종손 신분 때문에 불가피하게 거쳐야 했던 특이한 삶의 내력을 적절하게 엮어 나간다. 이 작품은 마침내 귀경길에 오른 주인공이 자신의 차에 싣고 가던 위패상자를 내던져 버리려는 충동에 사로잡히는 모습을, 그리고 운동권 학생과 전교조 교사의 경력을 가진 오래 전부터의 여자친구―이를테면 「열린 세계」의 전형적인 주민―와 결합하기로 결심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끝난다.

이런 경개를 가진 「조매제」가 유달리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온 것은 유교적 씨족주의의 전통을 오늘 어떻게 이해하고 처리해 나갈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뜻깊은 시사를 거기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매제」는 이 문제와 정면으로 대결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인데, 이 작품을 차분히 읽어보면 대결양상이 상당히 높은 인식수준과 적절한 균형감각을 동반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어 의의가 각별하다.<이동하 문학평론가·서울시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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