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위권 발동 겨를없어 감독못해” 최세창/5월20일 발포는 위협사격였을 뿐최세창/시해현장 동석에 군부 등 비난 알아정승화/의원들 의사당 출입 통제 명령 확실최화균12·12 및 5·18사건 25차 공판이 29일 상오 10시 서울지법 417호 대법정에서 형사 30부(재판장 김영일 부장판사)심리로 열렸다. 이날 공판에서는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과 최화균 전 33사단 101연대 1대대 작전참모, 최세창 전 3공수여단장 등 3명의 증인신문이 진행됐다.
▷정승화 전 육참총장 증인신문◁
신정철 변호사=육본 인사관리처장이었던 박준 병피고인을 20사단장으로 추천한 것이 전두환 피고인인가요.
『아닙니다』
―10·26직후 이건영 2군사령관을 통해 20사단의 서울 진주를 지시한 것도 전두환피고인의 부탁에 의한 것은 아니었지요.
『그렇습니다』
김영일 재판장=10·26 직후 국민과 군부내에 증인이 박대통령 시해현장에 있었던 사실에 대한 비난이 있었던게 사실이지요.
『그렇습니다』
―당시 대통령에게 사임의사를 표시했습니까. 도의적 책임이라도 지고 사임의사를 표명했어야 하지 않았나요.
『국가 공백기를 넘기고 안정을 되찾으면 적당한 시기에 사의표명을 하려고했습니다』
―10·26 당시 김재규가 권총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지 못했나요.
『당시 와이셔츠 차림이었고 다급한 모습이었으나 권총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박대통령 시해 직후 김재규와 승용차를 함께 타고 갈때 누가 박대통령을 살해했는지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까.
『대통령이 돌아가셨다는 얘기만 하고 「누가 죽였느냐」는 질문에는 아무런언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김재규와 계엄선포 문제등 향후 대책을 논의한 사실이 있습니까.
『김부장이 계엄을 선포하는 등 수습방안을 빨리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적은 있지만 서로 상의하거나 지시를 받을 입장은 아니었습니다』
―79년 11월24일 증인이 전군주요지휘관회의 석상에서 박대통령 시해사건이 국가 전체적으로 볼 때는 잘된 일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는데 사실입니까.
『과장된 거짓말입니다. 당시 3군사령관이 유신헌법을 폐지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주장을 해 본인은 박대통령 지도아래 있을땐 유신헌법이 불가피했고 이왕 돌아가신 마당이니 새 헌법이 제정돼야 될 것이라고 했을 뿐입니다』
▷최화균 전 33사단장교 증인신문◁
김상희 부장검사=80년 5월17일 하오 10시30분께 직속상관인 33사단 101연대장으로부터 국회의사당을 점령하고 국회의원과 국회사무처 직원 등을 제외하고는 출입을 통제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까.
『그렇습니다』
―5월18일 새벽 100훈련단 상황실로부터 유선으로 국회의원들의 국회의사당 출입을 통제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까.
『무선인지 유선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런 명령을 받았습니다』
―5월20일 상오 10시15분께 국회의원 38명과 보도진 등 3백여명이 그날 개최될 예정이었던 임시국회에 참석하려는 것을 저지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날 육본으로부터 국회의원들의 국회의사당 및 의원회관 출입을 저지하라는 추가 지시를 받았습니까.
『육본에서 내려왔는지는 모르겠지만 100훈련단을 통해 그런 명령을 받았습니다』
서익원 변호사=국회의원들의 출입통제 추가지침이 육본에서 내려온 것이 확실합니까.
『육본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상급부대에서 내려온 것은 사실입니다』
김영일 부장판사=100훈련단은 어디에 있던 부대였습니까.
『당시 완전히 편제된 부대는 아니었고 영등포쪽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육본에서 100훈련단에 이르는 명령체계는 어떻습니까.
『육본→수도군단→100훈련단→대대로 명령이 전달됐습니다』
▷최세창 전 3공수여단장 증인신문◁
이부영 검사=80년 5월20일 광주역앞에서 12대대와 15대대가 시위대에 포위돼 시위대에 발포한 사실을 알고 있지요.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러나 발포가 아니고 위협사격이었습니다』
―당시 대대장들로부터 실탄지급 요청을 받고 실탄을 지급하도록 지시한 사실이 있지요.
『실탄지급 지시가 아니고 서울에서 가져간 대대의 실탄을 보관하고 있다가 대대의 요청에 따라 나눠준 것뿐입니다』
―이후 자위권 발동 명령이 내려진 뒤 시위진압 과정에서 자위권 발동 지침이 잘 지켜지고 있는지 확인과 감독을 했나요.
『확인이나 감독을 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5월27일 광주재진입 작전, 즉 상무충정작전에서 시위대에 무차별 사격을 가하고 도청을 점령한 사실을 보고 받았나요.
『무차별 사격이란 말은 어폐가 있습니다. 당시 잘 된 작전으로 평가를 받았습니다』
―당시 정호용 피고인을 어디에서 몇번이나 만났나요.
『전교사 등에서 몇차례 만나 진행사실을 보고한 바 있습니다』
김상희부장검사=3공수여단이 광주에서 최초로 발포했다는 것은 의미가 있는데 정식발포가 아니고 위협사격 과정에서 사망자가 발생한 게 사실인가요.
『당시 대대에 부여된 임무는 시위진압 뿐만 아니라 주요시설에 대한 방어도 포함돼 있었으며 계엄상태였는데 빈총으로 그같은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겠습니까. 대대가 실탄을 안가지고 나갔다가 상황진전에 따라 대대장들이 위협용으로라도 필요하다고 실탄을 요청한 것입니다. 또 실제로 위협용으로 사용했고 그 과정에서 4∼5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입니다』
―다른 여단에서는 문제가 없었는데 왜 3공수여단만 위험성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실탄이 배급됐나요. 증인의 단독결정이었나요.
『임무수행상 필요했기 때문이었고 단독으로 결정했습니다. 또 실탄은 그때배급한 것이 아니고 기본장비로 서울에서부터 가지고 내려간 것입니다』
―결국 상부로부터 자위권 발동 지시가 있기 이전에 실탄을 사용한것 아닙니까.
『자위권은 부대원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임무수행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고 대대장들의 이러한 요청을 여단장으로서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이진강 변호사=계엄군으로 파견된 5월20일 이후 누구의 작전지시를 받았습니까.
『정웅 31사단장이 광주역에 나와 광주현장의 상황과 병력배치 등 작전명령을 직접 하달했고 「빨리 병력을 배치해 시위를 진압하라」고 독촉하기도 했습니다』
―5월20일부터 실탄이 배분돼 집단발포가 이뤄졌는데 누구의 지시에 의한 것입니까.
『대대장들의 요청에 따라 본인이 직접 실탄분배를 지시했고 육본측의 자위권 발동과는 관계없이 이뤄졌습니다』
서익원 변호사=5월21일 전교사사령관 등 상부로부터 자위권발동 지시를 받은 시기나 장소, 방법등을 알고 있습니까.
『구체적인 것은 전혀 기억이 없고 자위권 발동지시가 있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정웅 31사단장은 증인이 당시 상황보고도 하지 않았고 소환명령에도 응하지 않는등 실질적 지휘권행사가 불가능했다고 진술했는데 사실입니까.
『직접 소환명령을 받은 적도 없고 상황보고를 하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만 당시 상황에 비춰 제대로 보고가 이뤄질 수 있는 여유가 전혀 없었고 31사단장뿐만 아니라 그 누구한테도 상황보고가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또 아무한테도 보고할 겨를이 없을 정도로 일방적으로 쫓기고 있는데 지휘권 이원화 운운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김영일 부장판사=실탄의 지급배분 재량권이 각 대대장에게 주어져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정호용 사령관으로부터 명령을 받은 적은 없습니까.
『없습니다』<정리=송용회·박진용 기자>정리=송용회·박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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