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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즘­넓이와 깊이(신문학사 탐구: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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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즘­넓이와 깊이(신문학사 탐구:15)

입력
1996.07.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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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김기림,박태원,최재서/시대초월의 “날개” 갈망한 이상/「오감도」에 “미친 잠꼬대” 항의 빗발/“남보다 수십년 뒤처져도 되나” 응수/있지도 않은 「근대」 오히려 뛰어 넘으려객:「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오(길은 막달은 골목이 적당하오)」만큼 30년대 우리 문단에 큰 파문을 일으킨 것은 흔하지 않겠지요. 이상 김해경(1910∼37)의 저 유명한 「오감도」(시 제1호) 아닙니까. 상허 이태준의 알선으로 조선중앙일보(1934.7.24∼8.8)에 연재한 연작의 첫번째 작품. 미친 놈의 잠꼬대라는 독자의 항의로 중단되었다는데 맞습니까?

주:제법 성난 목소리로 이상은 이렇게 말했지요. 「왜 미쳤다고들 그러는지. 대체 우리는 남보다 수십 년씩 떨어져도 마음놓고 지낼 작정이냐. 독자도 공부를 해야 되지 않겠는가. 적어도 물건이 다른 작품이다. 1931∼32년 간에 쓴 2,000점 중에서 30점을 골라 발표하려 했다. 이 용대가리를 그래도 알아주는 이는 이태준과 박태원이다」라고.

객:짤막한 이 항의 속엔 이상문학의 위상이 요약되어 있군요. 뭔가 새로워져야 한다는 강박관념이랄까 모더니티에 대한 열정이랄까.

주:식민지 경영을 위해 일제가 세운 고등공업 건축과 출신, 서울토박이 이상의 첫 작품은 한글 장편 「12월12일」. 총독부 관리이기에 그들의 기관지 「조선」(1930)에 연재한 것이지요. 한편 그는 건축기사인지라 건축기관지 「조선과 건축」(일문잡지)에 도안도 그리고 시도 발표했지요. 「이상한 가역반응」, 「오감도」 등을 일어로 발표한 것이 1931년. 21세 적이지요.

객:「12월12일」은 일종의 습작이니까 제쳐둔다면 이상의 시작은 일어로 된 것이겠군요.

주:일어라든가 조선어라는 구별이 당초 무의미한 자리. 도안이나 설계도나, 혹은 그것들 뒤에 붙인 해설이랄까, 그런 범주이기에, 기호의 일종이었을 따름. 아라비아숫자가 기호이듯, 일어도 조선어도 기호로 인식되었던 것.

○조감도와 오감도의 차이

객:기호라면 문학 초월이거나 미달 아닌지요?

주:난문 중의 난문. 그의 「오감도」가 아직도 문학적 스캔들로 우뚝 솟아 있음도 이 난문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조감도(새가 아래를 내려다 보는 그림)란, 그러니까 총천연색의 일상적 인식방법인데, 획 하나를 빼냄으로써 일순간 오감도, 즉 흑백의 비일상적 그림으로 변해 버리지 않겠는가. 총천연색에서 흑백으로 바뀌는 그 순간에는, 모든 판단이 중단되는 것. 이승과 저승, 안과 바깥의 갈림길도 이와 같은 것.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지요. 거울에서 보는 기하학적 대칭점의 발견에 비하면 본질적인 것이 아닐까.

객:단순한 지적 놀이가 아니다? 한 인식체계에서 다른 인식체계로 바뀌는 그 순간적인 장면의 경이로움이 이상문학의 본질이라면,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의 우열은 아무 의미가 없겠지요. 조감도나 오감도, 어느 것이나 그 자체로 존재하는 등가물이다?

주:「평행선은 교차하지 않는다」가 유클리드기하학의 제5공리 아니겠는가. 「평행선은 무한점에서 교차한다」가 비유클리드기하학 아닙니까. 유클리드기하학이 성립된다면 비유클리드기하학도 성립되는 것. 지각의 기하학과 추상(아인슈타인의 공간개념)의 기하학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 것.

객:잠깐, 유클리드기하학이 천연색의 「조감도」라면 비유클리드기하학은 흑색의 「오감도」이다, 이 두 인식체계는 우열관계가 아니라 상호 공존관계인 것. 이 사실의 발견이 이상문학의 본질이라면 이상문학은 모더니즘계이기보다는 포스트모더니즘계라 볼 수 없겠는가.

주:다음 두 사람의 말을 인용해서 제 대답을 대신할 수 없을까. (A)「가장 우수한 최후의 모더니스트 이상은 모더니즘의 초극이라는 이 심각한 운명을 한 몸에 구현한 비극의 담당자였다」(김기림), (B)「포스트모더니스트가 아니면 아무도 모더니스트일 수 없다」(리오타르).

객:회색의 세계, 이른바 헤겔이 말하는 관념의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문학이 그동안 묘사(기억)해 온 일상적 삶(천연색)을 비판한 것이 이상문학이라면, 이 사실은 단순히 이상이라는 한 천재의 단독행위일까 아니면 동시대의 사람들도 어렴풋이나마 그렇게 인식했던 것일까. 이 점이 궁금하네요.

○서양 신사조 그대로 소개

주:구인회(1933)와 삼사문학(1934)을 일단 떠올릴 수 있지요. 김기림 이태준 박태원 정지용 김유정 이상등이 만든 구인회란 통칭 순문학파라 부르지 않습니까. 후퇴하는 카프문학에 뒷발을 걸며 등장한 세력권이라고나 할까. 이시우 한천등 소장파들의 모임이 삼사문학인데, 이상도 여기에 관련이 있습니다. 이들의 지적 욕구를 채워준 것은 제국의 수도 도쿄의 문화풍토였지요. 「시와 시론」지를 비롯, 「세르팡」 등의 잡지들이 제1차대전 이후 세계(서양)의 사상 및 예술의 신사조를 아낌없이 소개해 주고 있었으니까.

객:그러한 사조들과 관련시켜 최재서 김기림 박태원을 조명해 본다면? 이들이 이른바 모더니즘의 기틀을 놓은 챔피언들 아닙니까.

주:「울창한 삼림 속을 진종일 헤매이고 끝끝내 하나의 인상을 훔쳐오지 못한 환각의 인간, 무수한 표정의 말뚝이 공동묘지처럼 똑같이 보이기만 한 인간」(「동해」의 일절)이 다름 아닌 작가 이상임을 알아차린 최초의 평론가가 최재서였지요. 식민지에 세워진 경성제대(1926) 영문학과에서 낭만주의의 상상력을 공부한 그가 당대의 영국평단에 주목하고, 이를 철저히 소개하기 시작했지요.

객:카프문학이 퇴조하는 틈을 타서 등장한 주지주의 소개. 더 정확하게는 T. E. 흄의 「불연속적 세계관」(실재론)에 근거한 T. S. 엘리어트, H. 리드, I. A. 리처즈등의 이론들.

주:연속적 세계관에 기초를 둔 사상이 낭만주의 및 휴머니즘이라면, 그리고 르네상스 이래 인류사가 이런 사상으로 밀어 붙였고, 그 결과 세계가 혼돈으로 빠져 들었다면, 이를 구출할 20세기스런 사상은 무엇인가. 흄의 처방이 단순하나 그럴 법했지요. 불연속의 세계관이 그것. 인간은 유한하기에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것. 질서가 요망된다는 것. 사조상 고전주의. 시에서의 이미지즘, 비평상의 주지주의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 생명적 예술에서 기하학적 예술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 인간스러움을 깡그리 제거한 예술, 그러니까 추상적이고, 분명하고, 메마르고, 당초무늬같은 것이어야 한다는 것. 객관적 상관물이어야 한다는 것.

객:공감각을 내세운 김광균의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외인촌」)에서 보듯, 선명한 이미지의 시겠군요. 새롭기는 하나 너무 단세포적이라 할 수 없겠는가. 대체 무엇에 대한 새로움인가.

주:상징파 시의 애매몽롱함에 대한 비판이었기에 새롭지요. 프랑스 상징시에 조예깊은 엘리어트가 「황무지」를 쓴 것은 이 점에서 우리의 경우와 다르겠지요.

객:김기림의 「기상도」(1936)와 「태양의 풍속」(1939) 등을 「황무지」와 견주어 논하는 연구자도 많은데, 어떻습니까?

주: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럴만한 근거가 충분하지요. 김기림이 주지주의 이론에 썩 밝았으며 그 한계도 누구 못지않게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니까. 1935년에 이미 그는 시의 발전사를 다음처럼 정리할 수 있었으니까. (1)사물을 통하여 시인의 마음을 노래하기 (2)사물에 대하여(부딪쳐서) 시인의 마음을 노래하기 (3)사물의 인상 (4)시 자체의 구성을 위한 사물의 재구성.

객:(1)표현주의(낭만적 상징파 포함) (2)인상주의(이미지즘) (3)초현실주의 (4)객관주의에 각각 대응되겠는데, 문제는 (4)에 있겠군요.

주:김기림은 물론 (4)의 경지에 나아간 것은 아니지요. 장차 나아가야 될 시의 혁명단계라고나 할까.

객:그러고 보니, 모더니즘이란 나올 수 있는 가능성 대부분을 탐색해 보인 시험장이었겠는데요. 자본주의의 발달과 연계된 현상으로 볼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최재서·박태원의 포기

주:자본주의 발달과 직결된 것이 도시화라 볼 수 없겠는가. 서울의 도시화가 대대적으로 진행된 것이 1924년. 조선의 총인구는, 1925년 현재 1,952만2,945명(조선인 1,902만, 일본인 44만3,402, 외국인 5만9,513명). 1930년 현재 서울의 인구는 39만4,240(부산 14만6,098, 평양 14만703명). 다방, 카페가 생기고 극장에선 할리우드 배우들이 판을 치며, 마침내 백화점이 현란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가. 모단걸이 거리를 누비게 되고. 폐병장이 이상이 다방과 카페를 자영하기도 했고….

객:소설가 구보씨(박태원)가 대학노트를 끼고 종로에서 서울역과 화신 앞을 걸으며 다방도 들르고 카페에서 목 축이기를 일삼을 수 있었겠군요. 그렇지만 과연 그 구보씨는 에펠탑과 백화점 「오 봉마르세」와 유리천장의 아케이드에 몰려드는 군상들, 샹젤리제거리 가득 돌진하는 군중들의 발견에 놀란 우수의 시인 보들레르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었을까.

주:날카로운 질문이군요. 모더니즘이 지닌 천박성(낙관주의)이랄까 방향성 부재라고나 할까. 탈이데올로기적 성격이라고나 할까.

객:이상은 죽었고, 최재서는 신체제문학으로 달려갔고, 박태원은 중국고전 수호지 번역으로 나아갔던 것. 가치중립성이랄까. 그러고 보니 김기림은 예외적으로 보이는데요.

주:모더니즘의 역사적 종언을 1939년에 이미 발견한 장본인이었으니까. 철저하지는 못했으나 그만이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으로 모더니즘을 보았던 까닭.

객:있지도 않은 근대를 창출해 내고, 그것을 이번엔 초극하고자 하다가 날개는커녕 두더지가 되어, 멜론(레몬)을 달라며 외치다 죽은 이상문학이 지금도 빛나는 까닭도 이제 조금 알만 합니다.<김윤식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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