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쉬움 남는 「두명의 연출」 실험연극은 여행이다. 작가와 연출은 그 계획을 짜고 배우는 그것을 실행한다. 물론 그 성공 여부는 계획의 치밀함과 배우의 실행력에 달려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관객의 동참 여하에 따라 드러난다. 즉 관객들이 시종 관심을 집중하며 배우와 동일한 작품세계를 경험했다면 성공으로 판단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그저 객석을 채웠을 뿐, 실질적인 공감을 이루지 못했다면 실패로 봐야 한다.
연극에서 실험의 목적은 바로 이 공감의 질을 높이는 데 있다. 따라서 덥지도 차지도 않은, 미지근한 공감의 상태를 경계하며, 기존과 타성의 무비판적인 수용을 거부한다. 그러나 거부 자체가 실험의 본질은 아니다. 아르또가 「잔혹연극」을 주장하며 공연히 선혈만 낭자한 무대 추구나 대사의 무조건 배제를 경계한 것도 실은 이 때문이다. 즉 아르또의 「잔혹」이 그 핵심을 「새로우면서도 엄격하고 정확한 연극언어」에 두듯이 실험은 기존보다 훨씬 강하고 정확한 표현방법을 찾는 행위이다.
너덜너덜 타다 만 듯한 천조각들이 안쪽 벽을 가리고, 공중에는 앙상한 갈빗대와 엉겨붙은 오장육부의 형상이 걸려 있다. 채승훈이 쓰고 연출한 「꽃잎같은 여자 물위에 지고…」의 무대모습이다. 버림받고 자살하는 한 여인의 응축된 한. 그녀의 타버린 속과 녹아내린 애간장. 한 여배우(김호정 분)가 그것을 표현한다. 연극 연습장면이다. 극중 연출(이연규 분)은 「햄릿」의 오필리어 연기를 해 가며 연습을 돕는다. 오필리어 역시 버림받고 한을 품은 채 자살하는 여인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연기방식으로 보나 전체 형식으로 보나 분명 실험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여인의 고통이 그대로 배우와 관객의 고통이 될 때 비로소 유효하다. 그 판단을 위해서는 채승훈이 선택한 몇몇 장치들을 살펴 보아야 한다. 우선 김호정의 대단히 정적인 춤사위와 단말마처럼 간간이 토해내는 대사는 관객들로 하여금 너무도 애절한 여인의 한을 공유하도록 했다. 또한 다소 설명적이고 정리가 덜 되어 거칠긴 했지만 이연규의 힘차고 동적인 양식 연기도 대조를 이루며 김호정의 표현을 강조해 주었다.
그러나 마지막에 등장하는 또 다른 연출(채승훈 분)의 존재는 관객들에게 이완된 웃음을 선사하는 정도에 머물렀다. 즉 서사극처럼 극을 깨며 관객의 객관적 의식을 일깨우거나 부조리극처럼 극중 현실과 극중극의 혼재를 한 단계 더 진전시켜 세상의 본모습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실험의 완성을 위해 반드시 되짚어 봐야 할 대목이라고 생각한다.<오세곤 연극평론가·가야대 연영과 교수>오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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