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석불·석탑·주춧돌/거대한 석조미술 전시장폐허가 된 옛 터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떠돈다.
월악산 송계계곡 덕주사에서 4㎞쯤 더 거슬러 올라가는 하늘재 초입에 자리잡고 있는 충북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 대원사터도 그러한 곳이다. 이곳에는 산골답지 않게 넓은 분지가 펼쳐져 있고 그 땅을 가득 채우고 남을 듯한 석불과 석탑 석등 돌거북 그리고 헤아릴 수조차 없는 주춧돌들이 마치 거대한 석조미술 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전설에 따르면 이 절터는 신라의 마지막 왕자 마의태자가 망국의 한을 품고 금강산으로 들어가던 도중 세웠다는 설과, 고려 태조 왕건이 세웠다는 설이 있다.
또 절 터 한 편에는 설악산 흔들바위를 연상케 하는 바윗돌이 있는데 이는 온달장군이 갖고 놀던 공깃돌이라고 하니 고구려와도 관련된 곳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전설로 절터는 교통과 전략적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소백산맥이 가로막고 있던 과거에는 이 곳 하늘재를 넘나드는 고갯길은 남한강의 수송능력과 합쳐져서 국토의 남북을 잇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신라는 일찍이 이곳을 기점으로 북진정책의 교두보를 확보했고, 고구려 온달 장군이 계립령(현재 이름 하늘재) 이남의 옛 땅을 회복하지 않고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한 곳도 바로 이 일대였다.
미륵리 대원사터는 어느 시기 어떤 세력에 의해 창건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1977년 발굴 조사로는 통일신라 시대의 막새기와가 수습되었고 팔각석등이나 삼층석탑이 통일신라기의 조각수법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16.6m의 미륵대불과 5층 석탑 사각석등 당간지주 등은 완연한 고려시대의 석조물이어서 통일신라 때부터 있던 가람이 고려시대로 접어들면서 전성기를 구가했음을 알 수 있다. 건물터에서 나온 기왓장으로는 본래의 이름이 대원사였고 1192년에 지붕의 기와를 고쳤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이끼가 끼지 않는 미륵부처의 얼굴이다. 다른 몸체에는 돌이끼가 가득 피었지만 얼굴만은 금방 세수를 하고 나온 듯 말쑥한 모습이다. 이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은 채 미륵부처는 미소만 짓고 계실 뿐이다.
가는 길은 동서울 터미널에서 한시간 간격으로 있는 수안보행 버스를 타고 수안보에서 미륵리 가는 버스를 탄다.<이형권 역사기행가>이형권>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