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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소와 장식(박경리 칼럼:6·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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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소와 장식(박경리 칼럼:6·끝)

입력
1996.07.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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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 넘쳐나는데 정신은 결핍증/예술도 「일회용 쾌락」으로 전락한듯/어머니인 대지가 죽어가는데도 변명만 할 것인가『내가 원해서 세상에 태어난 것은 아니다』 어떤 문학소녀가 한 말인데 너무나 당연하고도 당연한 말이다. 이 세상에 원해서 태어난 사람은 없다. 사람뿐이랴. 존재하는 생물, 그 일체는 결코 원해서 태어난 것은 아니다. 신물나게 되풀이되어 온 질문이지만 그러면 그것은 누구의 의지에 의한 것인가. 아니 그것을 따지기 전에 생명의 본질을 알지 못한다면 누구의 의지인가. 그 해법은 없다. 과학을 바탕으로 하거나 혹은 상상에 의거하거나 간에, 생명의 근원에 대한 설은 구구하게 있어 왔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는 그 비밀의 문턱에서 주저앉고 말았으며 오묘한 그 곳을 엿볼 수는 없었다. 우리는 신, 혹은 창조주를 본 일이 없고 만났다는 것을 증명하지도 못했다. 천당이나 지옥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며 어디서 생명이 왔고 가는 곳이 어디인지를 알지 못하며 자신의 운명도 알지 못한다. 영국의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가 마지막, 세상을 떠나려는 어머니의 축복을 거절한 것을 그의 사촌이 힐난했을 때, 신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어 그랬노라, 사촌은 다시 힐난하기를 신이 없다고 생각했다면 거짓으로라도 어머니의 소원을 들어 줄 수 있는 일 아닌가. 그러나 조이스는 신이 없다는 것도 확인할 수 없었다는 말을 했다. 이 에피소드에서 우리는 인생을 정면으로 돌파하려는 그의 치열한 작가정신을 읽을 수 있었다.

시작의 길은 끝이 없고 이정표 없는 길을 헤맨다는 것은 비극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축복일 수도 있고 생명이 존재하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완성은, 혹은 도달은 정지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미완, 기약없는 것에 대한 탐구, 다만 우리에게 확실한 것이 하나 있다면 자기 사명에 대한 자결권이다. 동물의 경우에도 예를 들자면 짝을 잃은 거위가 거식으로 죽었다든지 섬에 데려다 놓은 꿩이 홀로 그 외로움에 못 견디었는지 스스로 바위에 머리를 부딪쳐 죽었다든지, 그런 얘기 들은 기억이 있다. 모든 생명은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만큼 스스로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가능성이 동물이라고 전혀 없다 할 수 있을까. 하여간 사람에게는 확실하게 그것이 있다. 내가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항변과 동시 자결권은 그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아이러니다. 해서 그렇게 태어난 것이 원망스러우면 왜 여태까지 살았느냐, 하며 냉혹히 말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생명의 자결권 보유

근원적으로 사람이 존엄하고 자유로운 존재인 것은 자기 생명에 대한 자결권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어떠한 사람에게도 고통은 있다. 한번쯤 죽고 싶다는 생각을 안해 본 사람이 과연 있을까. 산다는 것은 힘들고 생명은 애처로운 것이다. 오늘날과 같이 지구는 오염되고 생태계는 극심하게 파괴되어 가는 현실에서는 사람도 그러하지만 동식물의 삶은 그야말로 단말마와도 같은 고통으로 처참하다. 먹을 것이 없고 쉴 곳이 없고 인간문명에 쫓기어 수없이 많은 것들이 도태되고 있다. 이럴 경우 왜 태어났는가 하는 의문은 처절한 것이다. 인본주의를 떠받드는 사람들 중에 인간문제는 도외시하고 동식물을 의인화하는거냐 뭐냐 하고 혹 나무랄 분이 계실지 모르지만, 하기는 르네상스 이후 인본주의는 인류의 지표였고 오늘까지 휴머니즘이 높은 덕목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오늘의 현실을 초래했다는 부정적 측면을 인정해야 하고 인간 위주의 환경운동이 전철을 밟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으며 인간평등의 역사적 투쟁이 생명평등의 의식으로 전환해야만 인류는 균형을 회복하고 지속적 생존을 영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삶의 탓 남에게 전가

이야기가 옆길로 빠진 것 같은데 여하튼, 딜레탕트라 해야 할지, 그런 사람들의 관념적인 항변, 소위 부조리한 탄생문제에 관한 얘기였는데 매우 정당한 사실을 말했음에도 그것이 공허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대신 고통에 신음하는 계층의 원색적인 저주, 태어남에 대한 분노는 신선하고 정직하다. 어쨌거나 그들은 잡초처럼 끈질기게 절망을 극복하고 살다간 우리들 대부분의 민초들 모습이기 때문이다. 현학적 혹은 철학적 논리보다 삶 자체의 진실은 바로 맥박이기 때문일 것이다. 반대로 전자의 항변에는 분식된 자의식이 있고 일종의 둔사로서 이기주의와 자기합리화의 무책임이 도식 속에 숨겨져 있는 것이다. 어째서 그들은 자결의 열쇠를 쥐고서 삶의 탓을 남에게 전가하려 하는 걸까. 이러한 모순의 보호막이 즉 냉소와 장식으로서의 언어다. 불행하게도 그같은 수사학에 탐닉하는 지식인들의 병폐를 나는 여러 곳에서 보아 왔다. 손도 발도 내밀 수 없었던 일제시절, 냉소와 방탕은 일부 지식인들의 정신적 저항의 수단이 되기도 했다. 절망과 분노, 고뇌와 갈등의 반사적 행위요 심리라 할 수 있었다. 타는 듯한 목마름, 무력감, 자포자기의 자해행위였다. 해방이 되고 6·25전란을 겪다가 독재치하에 들어갔고, 민족이 분열되어 격심한 이념투쟁에 휘말리어 정신이 황폐해지고, 그러나 한 가지, 일본인이 없는 내 땅에서 살고 있다는 자부심, 미래가 보인다는 그 점이 오늘을 이루게 한 원동력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뤄놓은 오늘은 우리에게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 볼 시점에 와 있다는 것을 절감케 하는 것이 바로 오늘의 상황인 것이다. 모든 것은 물리적으로만 진행되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예감은 거의 틀림이 없을 것이다.

여기서 물리적이라 한 것은 문리의 바른 이치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상대적인 뜻에서 한 말이다. 물론 여기까지 오는 동안 지식인들의 공헌을 간과할 수는 없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지식인은 기술자가 아닌 창조적 분야에 있어야 할 사람들인 것이다. 창조적 분야라 했을 때 그 얼마나 그 분야가 황폐해 있는가를 깨닫고 모골이 송연해진다. 한 마디로 문명은 전성기를 맞아 전국토에 넘쳐 흐르고 있으나 문화는 찬 서리 맞은 가을꽃이 되고 말았다. 물질은 있으되 정신에는 큰 공동이 생겨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이다. 오늘 사회는 그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한 가지만 예를 들겠다. 어느 분야라 할 것 없이, 정치 문화 경제 교육, 어느 한 곳 빠짐없이 만연되어 이미 기정사실로 된 것이 내용없는 세몰이현상이다. 내용이 없는데 어떻게 그것이 지상에 세워질 수 있겠는가. 바닷가의 모래성처럼 물결이 올 때마다 무너지고 만다. 만들어 낸 것은 없고 도로에 그치는데 결국 일회용이요 한건주의다.

모든 것은 밖에서 들여왔다. 특히 일본에서 저질의 것을 골라 잡아 들여왔다. 백화점에서 줄줄이 서서 절하는 것까지 들여왔다. 그것이 마음이 아닌 물리적인 것이라는 데 불쾌감이 있고 불필요함을 느낀다. 모방 복제품, 사고방식까지 모방과 복제품으로 범람하고 그것들이 창고에 가득가득 쌓여 있고 상점이며 거리며 어느 가정 할 것 없이, 모든 구조물 속에서도 흘러 넘치고 있다. 결국 그것들은 쓰레기로, 정신적 쓰레기로 이 강산에 버려지고 배설된다. 절망의 반사였던 냉소는 대인관계에서 처신의 스타일이 되었고 방탕은 분노와 갈등 자학적 묘사가 싹 빠져버린 순수한 쾌락으로 일회용 주사기가 되고 말았다. 인생이 없어진 것이다. 삶의 가치가 없어진 것이다. 과연 예술은 존재하는가? 의심할 밖에 없다. 예술은 장식품인가 쾌락인가. 그것을 공급하는 것이 예술가인가. 일부 작가들은 수요자를 위해 상품가치가 높은 것을 생산해 내야 한다고 핏대를 세우고, 언론매체는 일회용으로 전면을 메우고 있다. 독자 시청자는 소비의 왕이요 황금알을 낳는 거위다. 언제까지? 소비자의 호주머니는 마르지 않는 샘이란 말인가. 바닥이 날 때, 그 때는 어쩔 것인가. 우리 다 함께 죽자는 체념이 이렇게도 사회를 혼란 속으로 몰아넣는 것은 아닐는지.

○먹어도 배고픈 불안

비만의 원인 중 하나가 욕구불만에서 오는 과식이라는 것이다. 장식과다도 결핍감의 반사심리라 했다. TV화면을 보고 있으면 사람은 안 보이고 장식만 주렁주렁, 박넝쿨에 박이 매달린 듯 눈에 띈다. 행사장은 꽃으로 묻혀 있어도 정작 꽃은 보이지 않고 향기도 느낄 수 없다. 저 쓰레기를 어쩌누, 하는 생각 뿐이다. 욕구불만, 결핍감, 이 풍요한 세상, 쾌락은 어디서라도 구할 수 있고 물품은 빈 곳 없이 채워져 있는데 사람들은 어찌하여 욕구불만 결핍감에 빠져야 하는 것일까.

옛날, 여인들이 바느질해 놓은 한복을 바라보며 선이 살아 있다고 한 말을 나는 기억한다. 선이란 무엇인가. 선이 살아 있다는 뜻은 무엇인가. 바로 균형이다. 균형은 생명인 것이다. 백자도 따지고 보면 선을 오므린 것이며 나타나는 것도 바로 선이다. 선이 살아 있다는 것은 생명감을 이르는 것이다. 우리 문화는 선의 문화이며 생명을 찾는 문화였다. 여기서 일일이 예를 들 수는 없지만. 생명의 선을 찾을 수 없을 때 개칠을 하는 것이다. 생명의 선을 찾을 수 없을 때, 사람들은 불안을 느끼며 개칠은 불안의 행위다. 뭔가를 덧붙이고 또 덧붙여도 불안해지는 요즘의 사회풍경,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현상, 아귀지옥을 연상하게 한다. 자본주의는 말할 것도 없이 상업주의다. 파는 것이 지상이며 이윤을 얻는 것이 필수다. 옛날에는 족보 팔아 먹은 놈이라 하여 패륜아로 몰아세웠지만 오늘은 그렇지가 않다. 팔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돈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가릴 것이 없다. 그리고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아귀지옥이야말로 상업의 천국이다.

대체 그렇다면 우리들의 불안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어머니를 잃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잃은 고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어머니인 대지를 잃어 가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의 젖줄인 강물을 보면 알 것이다. 어머니는 깊이 병들었고 젖줄마저 썩어 가고 있는 것이다. 지식인들은 냉소로써 변명하고 몸을 사리거나 뒷짐을 지고 먼 산을 바라보고 있다. 일부 지식인은 거울 하나를 얻은 야만인같이 남의 것을 우러러 떠받들며 후광을 얻으려 하고 또 일부는 뜨내기 장사꾼같이 북을 치며 질 좋은 상품임을 외치고 있다. 어느 산골짝 이장이 촛불을 켜는 한이 있어도 핵은 없어야 한다 하는가 하면 국회 개원연설을 한 어느 대표는 3만불 국민소득을 장담하고 있었다. 3만불, 그것은 국토의 초토를 의미한다. 이와 같은 엄청난 괴리, 지식인들은 어디메쯤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걸까.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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