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경제적으로 어려운데 월드컵으로 너무 축제분위기가 길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앞으로 6년후에 치를 이 거대한 행사를 치밀하게 준비해야 하고, 다행히 문화월드컵의 중요성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형성되고 있기에 몇 마디 느낀 바를 얘기하고 싶다.우선 문화라는 말이 오늘의 세계사에서 가지는 의미부터 짚어보자. 냉전체제 붕괴와 함께 국력의 의미도 크게 달라졌다. 이데올로기보다 경제가 전면에 부각되고, 군사력 못지않게 문화력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 보면 경제력과 문화력은 상호 보완관계를 가지고 있다. 궁핍 속에서는 문화가 싹트기 어렵고 문화적인 매력이 없는 경제력은 다른 나라의 존경을 받지 못한다.
생활의 질이란 문화적인 삶의 농도를 일컫는다. 문화력은 결국 학문 예술 지식 정보 등 인간의 정신생활의 풍요를 나타내는 것이며 정보시대의 경제력은 이러한 문화적 배경 없이는 그 질적 비약이 어려운 것이다. 경제력으로 끌어들인 월드컵을 문화력으로 꽃피워야 한다. 5,000년 역사에서 한국이 오늘처럼 세계의 주목을 받은 적은 없다.
그런데 그 가장 중요한 이유는 역시 한국이 개도국의 경제적 성공사례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월드컵을 계기로 경제만이 아니라 한국인의 문화적 전통을 세계만방에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 축구는 주어진 객관적 틀에 따라 실력을 겨루기 때문에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의 문화는 우리 민족의 개성과 한국인의 멋의 총체이기 때문에 다른 나라 사람에게 알릴 때는 우리 문화 가운데 보편적 메시지가 있는 것을 선택하여 재창조할 필요가 있다.
○개성속의 보편성
문화의 핵은 개성 속에 살아 숨쉬는 보편성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한일 월드컵 공동 개최의 경우 이 점을 깊이 유의해야 한다. 도대체 지금까지 한국과 일본은 좋은 일을 머리를 맞대고 같이 해본 적이 없다. 그런 점에서 월드컵 공동개최는 의미있는 실험이며 그것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연출되는 공개실험인 것이다.
특히 서구인은 한국을 중국이나 일본과 관련지어 생각하는데 익숙해 있다. 이 기회에 한국문화의 개성, 즉 중국과도 다르고 일본과도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으면 좋겠다. 여기서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한국과 일본문화의 이질성에 대한 자각이다. 한일 두 나라는 유교문화권이라는 공통의 기반이 있지만 유교를 수용하는 용기와 방법이 크게 달랐다. 그리고 광복후 한국은 산업화나 정당정치에 있어서도 일본을 모델로 하려는 시도가 줄곧 있었으나 그 과정과 결과를 보면 한일 두 나라의 차이, 이질성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한국인과 일본인은 비슷하게 생기고 밥을 주식으로 하고 문장의 구조도 닮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생긴 골격이나 식단의 구성, 그리고 문장의 맛이 다르다. 서구인이 동양인을 보듯이 대충 거시적으로 보면 한일간의 문화적 동질성에 대해 큰 의문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좀 세밀히 분석적으로 보면 다른 점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동안 우리는 한일간의 문화적 동질성을 당연시한 나머지 특히 경제력에 있어서 일본과의 격차에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했고 일본 따라잡기, 극일 등이 우리의 정서에 깊이 아로새겨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좋았다. 그러나 앞으로는 한국인의 가치관과 행동양식과 기질에 맞는 정치 경제 문화의 모형을 창조해 나갈 필요가 있다. 같은 길만 추구하면 앞서간 일본이 한국을 폄하하기 쉬울 것이며 한국이 일본을 따라가다 보면 일본의 실패한 전철을 다시 밟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 이질성에 대한 깊은 자각이 있을 때 우리의 문화적 개성이 나타날 것이며 또한 일본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지도 확실해진다.
○비교될 시민의식
한 마디로 문화라고 하지만 역사적 전통으로서의 문화도 있고 일상생활 속의 문화도 있게 마련이다. 이를테면 한국의 「선비」와 일본의 「사무라이」는 좋고 나쁜 점을 따지기 전에 크게 다른 문화적 원형이다. 월드컵 공동개최 때도 이러한 문화적 개성을 보편적 메시지로 재창조하여 보여 주었으면 좋겠다. 문제는 일상생활 속에 나타나는 문화의 수준이다. 질서 품위 여유 예절 기타 민주시민으로서의 덕목에서 그 나라의 생활문화의 수준이 그대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일상생활 속에 나타나는 문화수준에 있어서 일본이 돋보이는 것은 철저한 질서의식이다. 전세계가 두 나라 국민의 시민의식을 비교할 것을 생각하면 두렵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 국민의 지혜를 믿어도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전통문화에서 한일 두 나라가 서로의 개성을 살리고 생활문화에서 한국이 최소한 88올림픽 때처럼 질서의식의 수준을 지켜준다면 한일 두 나라의 좋은 점이 조화롭게 발휘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세계가 경제적 성과만 알고 있던 한일 두 나라의 문화적 저력에 다시 한 번 놀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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