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천년」이 묻힌듯… 서역인 무신상도 눈길역사의 도시 경주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무덤들이다. 마치 동산을 연상케하는 거대한 봉분들이 도시 한복판을 차지하고 있다. 수십기에 이르는 이 무덤들은 대부분이 왕릉이다. 지난 70년대 발굴조사 당시 수만점의 유물을 쏟아내 화려했던 신라 천년의 영화를 우리 앞에 되돌려 준 주인공들이기도 하다.
초기의 왕릉은 대개 시가지에 위치해 있으며 후기로 갈수록 풍수지리설에 따라 명당을 잡기위해 외곽의 산기슭에 위치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중 경주에서 울산방면으로 빠지는 국도변에 위치한 괘릉은 신라왕릉에서 가장 주목할만하다.
통일신라시대 완비된 능묘제도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평가되는 이 능은 신라38대 원성왕(785∼798재위)릉으로 추정한다. 구전에 따르면 원래 이곳에 있던 작은 연못에 왕의 유해를 걸어 놓았다하여 괘릉으로 불렸다 한다.
그런데 이 능앞에 서 있는 무인석은 놀랍게도 서역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키가 8척이나 되는 육중한 몸집에 눈이 깊숙하고 매부리코가 우뚝 솟아 있으며 귀밑에서 턱으로 흐르는 수염등은 신라인과 전혀 다른 모습이다. 또 곱슬머리를 무늬새긴 천으로 이마에서부터 질끈 동여매고 갑옷도 아닌 헐렁한 블라우스에 치마처럼 생긴 하의를 걸치고 오른쪽 주먹을 가슴에 모은 위압적인 자세는 우리나라 무인상 조각과 너무나도 거리가 멀다.
어떻게 해서 신라왕무덤앞에 서역인의 모습을 한 석상이 서있는지 그 정확한 내력은 알수 없지만 이로 인하여 우리는 신라 문화의 국제성을 엿볼수 있다. 아라비아의 9세기 문헌에 신라의 금과 철의 질이 좋다는 기록이 있어 직접 왕래의 흔적을 찾아볼수 있고 또 그당시 국제사회에 서역에서 온 무사들의 용맹성이 널리 알려져 있었으므로 왕릉을 호위하는 무신상모습을 서역에서 온 용병으로 조각하였던 것으로 추측할수 있다.
교통편은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경주가는 버스를 탄다. 경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울산행버스를 타고 괘릉입구에서 내린다.<이형권 역사기행가>이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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