팍스 코리아나(Pax Koreana)―한국은 세계의 패권국가가 될 것인가? 정부는 G7 진입을 목표로 설정하고 있지만, 기왕에 1만달러 고지를 돌파한 여력으로 더 큰 야망을 가져봄직도 하다. 꿈은 성취의 출발이라고 하지 않던가. 돌이켜 보면 그저 쫓아가기 바쁘고 뚫린 구멍 메우기에 정신 못 차리던 세월이었는데, 조금 느긋하게 생활의 멋도 찾고 못사는 나라 도와주고 언짢은 나라 야단치면서 일등국민으로 사는 시대가 올 법도 하다. 미국, 유럽, 일본, 중국에 주눅들어 눈치보며 사는 시대를 청산하고 그들이 한국인 앞에서 언행을 조심하고 「메이드 인 코리아」에 미치도록 만드는 그런 시대가. 20세기 경제발전사에서 한국은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진입한 유일한 국가이며, 지난 30년 동안 세계적 타이틀을 몇개 보유한 국가로 자리잡았으므로 패권국가에의 꿈이 결코 근거없는 것은 아니리라. 「아시아의 다음 거인」으로는 숨이 차지 않아 내친 김에 나서는 것도 근사해 보인다. 우선, 패권국가의 기본요건을 점검하면 이렇다. 인구 1억명 정도, 거대한 시장을 배후지에 갖고 있는 지정학적 위치, 지도층의 진취성, 교육열의와 사회적 개방성, 기업정신, 정부의 관리능력 등등. 통일을 전제로 약 10년간 고생하면 세계의 패권이 눈 앞에 다가와 있을는지 모를 일이다.○패권국가의 요건
영국을 최초의 패권국으로 만들었던 요인은 자유시장과 경영정신이었다. 기술수준이 대륙국가들과 유사한 위치에 있었음에도 영국이 산업혁명을 주도하였던 이유는 자유시장과 경영정신이 기술혁신을 촉진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윤 추구의지와 합리적 경영정신으로 무장한 기업인들이 철도를 깔고 시장을 개척하여 국부를 축적하였다. 기업정신이 훨씬 뒤떨어졌던 독일은 전문지식과 계획성으로 영국에 대적하였다. 정부는 낙후된 부문을 정확히 파악하여 전문인력을 배양하였으며 카르텔화를 주도하여 규모의 이점을 살려나갔다. 정부 주도의 기민한 계획이 자유시장의 장점을 압도한 것이다. 곧 이어 미국은 거대한 시장과 선진적 과학기술로 독일에 맞서 20세기의 패권국가로 부상하였다. 용의주도한 계획이 독일의 힘이라면, 미국의 저력은 다양성과 혁신에서 분출 되었다. 내연기관, 항공기, 통신장비, 트랜지스터, 컴퓨터 등의 발명품을 포함하여 테일러리즘, 포디즘, 대량소비를 위한 신용체계, 최근의 정보혁명등에 이르기까지 20세기를 수놓은 문명의 대부분은 미국산이다. 이에 비하면 60·70년대 일본의 등장은 아무래도 생산기술의 「일본화」와 「재벌」에서 찾아진다. 미국산 기술을 일본문화에 접목시켜 매력적인 상품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였는데, 상품개발과 판매과정에서 재벌조직이 연출한 거대한 협업정신은 미국식 독자기업의 자만심에 타격을 가했던 것이다. 머지않아 중국이 여기에 합세한다면 무진장의 노동력과 거대시장 덕분일 것이다.
그렇다면 세기의 패권국가와 대조하여 한국이 갖고 있는 상대적 장점은 무엇인가? 한국의 발전패턴은 독일 및 일본과 닮은 점이 많다. 그러나 독일의 전문성과 장인정신, 일본의 생산기술의 토착화와 같은 핵심적 요소를 결여하고 있다. 영국과 미국에 비하면 자유시장, 과학기술, 경영혁신의 측면에서 훨씬 낙후되어 있다. 한국이 그래도 내놓을 만한 것이 있다면 「빈곤정신」과 「투지」라고 할까?
○혁신주도형 경제
「아시아의 다음 거인」의 저자인 암스덴은 한국의 성장을 과학기술과 제도의 성공적 수용으로 설명하였다. 이 정도는 한국성장을 투입주도형으로 간주하는 미국의 경제학자 크룩만에 비하면 그래도 잘 봐준 것이다. 투입주도형이란 투입한 양만큼 거두는 경제라는 뜻이며, 따라서 신중한 운영방식 외에는 배울 것이 없다는 비아냥이 스며 있다. 크룩만의 극단적 견해가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지만, 혁신이 결여되어 있다는 지적은 깊이 새길만 하다. 왜냐하면 혁신 없이는 패권국가는 물론이거니와 현재의 위치도 고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팍스 코리아나」의 꿈에 다가서기 위하여 절실히 요구되는 혁신은 두가지다. 과학기술, 생산조직, 경영합리화등 생산성 향상과 직결된 혁신, 가용한 자원과 지식의 효용성을 극대화하는 사회제도적 혁신. 한국이 갖고 있는 상대적 장점을 고려할 때 후자에 국운을 걸어봄 직하다. 양질의 인적 자본을 향한 우리의 교육열망은 세계적이어서 서울은 이미 1인당 박사밀도가 가장 높은 도시가 되었다. 우수한 인적자본을 포함하여 사회의 동질성과 통합성이 높은 것도 중요한 사회적 자산이다. 우리의 주변을 둘러보면 무한한 발전에너지로 화할 수 있는 요소가 의외로 많이 발견되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제는 먼 기억으로만 회상될 뿐인 가난했던 시절의 경험과 투지는 다른 무엇보다도 귀중하다. 최근의 경제위기설을 접하면서 빈곤정신과 투지라는 「메이드 인 코리아」의 자산을 패권국가로 향하는 에너지로 수렴시켜 내는 사회제도적 혁신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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