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해탄 넘은 “노동자 유대”의 꿈/“무산계급 동일성” 노래 나카노 시에 림화 “같은 형제” 화답객:근대성을 문제삼을 때, 서양적인 것과 일본적인 것이 가끔 혼동되기도 하는 모양인데, 가령 임화의 저 악명 높은 「이식문화사」도 그런 사례의 하나라 볼 수 없을까요.
주:이른바 현해탄콤플렉스라는 것. 현해탄이란 무엇이겠는가. 어떤 세대는 그것을 「네 칼로 너를 치리라」(춘원)로 요약하였고, 또 어떤 세대는 「나의 청춘은 나의 조국!/다음 날 항구의 개인 날씨여!」(지용)라 하였고, 아무도 그에게 수심을 가르쳐 주지 않았기에 나비 한 마리 청무우밭인가 해서 겁도 없이 건너 갔다가 날개는커녕 번데기로 변해 버린 경우(이상)도 있었고, 또 어떤 세대에겐 그것은 「홰」의 메타포이기도 했지요.
객:「예술, 학문, 움직일 수 없는 진리/그의 꿈꾸는 사상이 높자랗게 굽이치는 동경/모든 것을 배워 모든 것을 익혀/다시 이 바다 물결 위에 올랐을 때/나는 슬픈 고향의 한 밤/홰보다 밝게 타는 별이 되리라/청년의 가슴은 바다보다 더 설레이었다」(임화, 「현해탄」)
○열린세계·공간으로 인식
주:「비록 청춘의 즐거움과 희망을/모두 다 땅속 깊이 파묻은/비통한 매장의 날일지라도/한번 현해탄은 청년들의 눈 앞에/검은 상장(상장)을 내린 일은 없었다」(「현해탄」)
객:현해탄이라는 이름의 열린 세계, 열린 공간이 지닌 핵심성격이 선명히 드러나 있군요. 당대 지식인의 실감이라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을 듯한데요. 시인 임화의 도일은 언제였습니까.
주:1929년에서 30년. 서울 태생인 임화(본명 림인식, 1908∼53)의 학력은 보성중학 중퇴. 도시의 청소년답게 가출한 그는 다다이즘에 심취하고, 영화·연극에 달려갔고, 마침내 영화 두 편의 주연급으로 활동. 「유랑」(1928), 「혼가」(1929)라는 프로계 영화였지요. 조선의 발렌티노로 불린 22세의 미남청년 임화의 두 영화는 보기 좋게 실패. 「태양을 쏘이고 다니는 마부 역을 맡았음에도 자기의 역을 생각지 않고 미남자로만 나타내고 한 것」이 실패의 원인(「조선지광」, 1929·2).
객:배우 노릇 이전에도 그는 카프시를 썼지 않았습니까?
주:썼지요. 「지구와 박테리아」(1927)를 비롯, 카프 도쿄지부 기관지 「예술운동」(1927)에도 썼지요. 정말 시인으로 그의 두각을 크게 나타낸 것은 이른바 단편 서사시(김팔봉의 지적)계의 「우리 오빠와 화로」(1929) 및 「네 거리의 순이」(1929) 등에서입니다.
객:「단편 서사시」란 그러니까 줄거리를 가진 제법 긴 시이되, 노동자나 억압받는 무산계급의 고통과 희망을 노래하는 것. 외침 일변도의 초기 카프시에서 한 단계 나아간 형식인 모양이지요. 그런데 오빠라든가 누이 순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러한 형식이란, 민중에 접근하기가 용이하고 또 서정적이긴 하나, 일종의 센티멘털리즘에 머무른 것 아니었던가요?
주:그 서정성을 저는 누이콤플렉스라 부르지요. 우리 서정성의 한 원형이자 임화 시의 특징이기도 한 것. 임화의 이 「누이」(순이)는 평생을 지배한 것. 6·25때 그는 「너 어느 곳에 있느냐」를 썼지 않습니까. 「딸 혜란에게」라는 부제가 달렸지만 실상은 순이 계보에 드는 것.
객:임화의 숙청도 엄호석의 평론을 보면 이 시의 감상주의적인 요소와 관련된 모양이던데요.
주:한 가지 핑계일 수 있겠지요. 원래 남로당(이승엽 계) 숙청의 일환, 곧 정치적 사건이었으니까.
객:카프의 대표적 시인이자 영화배우인 그의 도일 목적은?
주:내세운 목적은 연극 공부. 현해탄 저 쪽에 연극, 진리, 사상, 그 모든 것이 있다고 믿었던 것이니까.
객:7개 국어를 배우기 위해 도일한 이상과 비슷하군요.
주:동기는 같으나, 체험내용은 썩 다르지요. 진짜 모더니즘(20세기)을 배우기 위해 도쿄(제국의 수도)에 간 이상 앞에 도쿄는 어떠했을까. 가짜이며 모조품이라고 김기림에 보낸 사신에서 적었지요. 임화의 도쿄체험은 어떠했던가. 한 마디로 조직훈련이라 볼 수 없을까.
○이북만 아지트에서 기식
객:조직훈련이라면 요즘 식으로 말해 운동권 생활체험입니까.
주:임화가 찾아가 기댄 곳은 다름 아닌 카프 도쿄지부(동경부 하길상사 2554번지). 거기 총책이 바로 저 유명한 이북만. 일본공산당 소속. 아내와 더불어 셋집에 살면서 거기다 카프 도쿄지부 간판을 걸었던 인물. 재일노동자 운동권의 구심체인 「무산자」의 주동인물의 하나. 연극공부하러 간 그는 결국 이북만 아지트에 기식하면서 당시 노동자운동의 조직훈련에 몸을 담았던 것이지요. 그런 생활에서 사귄 여자가 바로 이북만의 누이동생인 17세의 이귀례. 첫 번째 부인(두 번째 부인은 이현욱) 이귀례와 결혼하여 귀국한 임화가 카프 서기장이 된 것이 1931년이니까 한 1년쯤 지냈던가요.
객:카프운동이 볼셰비키화로 방향을 틀었을 때, 곧 제2차 방향전환기에 해당되겠군요. 동북사변을 계기로 공산당 탄압이 강화되는 그런 시기 아닙니까. 이들 신혼부부의 생활이란 동지적 결합으로 버티었을 법 한데요. 1932년도 카프조직표(「사상월보」 제10호)에 따르면 서기장 윤기정, 서기 임화로 되어 있고, 프롤레타리아극장동맹 책임자가 임화더군요. 그 산하의 청복극장 조직에 이귀례도 끼여 있고…. 이런 저런 점으로 미루어 보면, 임화의 일본체험은 그에게 조직생활의 기틀을 마련하는 계기였다고 할 수 없을까.
○더 큰 이념의 세계 목도
주:날카로운 지적입니다. 조선의 발렌티노인 미남청년 임화는 일본체험에서 좀 더 큰 이념의 세계를 본 것이지요. 설사 그것이 한갓 시적인 환각이었을지라도.
객:보다 큰 이념의 세계라면 그러니까 계급운동에서 보면 조선무산자와 일본 무산자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는 것.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그대들은 쇠사슬밖에 잃을 것이 없다」(「공산당선언」)의 이념세계.
주:한일 양국의 계급운동자는 형제이며 동일한 투쟁목표를 가진 것일까. 이 물음은 참으로 미묘한 것이기에 섬세한 문학적 감각이 아니고는 포착하기 어려운 심층부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시금석의 하나로 NAPF(일본무산계급예술동맹)의 간부 나카노 시게하루(중야중치·1902∼79)의 시 「비 내리는 품천역」(「개조」, 1929·2)을 꼽을 것입니다. 「XXX 기념으로 이북만 김호영에게」라는 부제를 단 이 시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신이여 잘 가거라/김이여 잘 가거라/그대들은 품천역(조선노동자들이 사는 지역의 역)에서 차에 오르는구나/이여 잘 가거라/또 한 분의 이여 잘 가거라/그대들은 그대들의 부모의 나라로 돌아가는구나…」
객:한일 양국의 노동자계급이랄까 민중 기반의 동일성을 노래한 그 유명한 작품 아닙니까. 재일조선인이라면, 또 그들을 동정하는 일본민중이나 지식인이라면 절대로 외면하지 못하는 작품.
주:맞소.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시는 천황을 공격하는 것이기에 너무 복자가 많아 온전히 해독되지 못했지요. 종전 뒤에도 복원할 수 없었는데, 원고도 잃어버렸으니 시인 자신도 복원할 방도가 없었지요.
○원문 조선어번역 기적이
객:그런데 무슨 기적이라도….
주:그렇소. 기적이라고나 할까. 그 시의 원문이 조선어로 번역되어 남아 있으니까. 「무산자」(1929.5, 69쪽)에 실린 「비날이는 품천역」이 그것. 훗날 시인 자신이 조선어역에서 유추하여 복자를 복원해 내었지요.
객: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선생의 평론집 「상처와 극복」(조일신문, 1975)에 실린 「임화론」에서 이 사실이 처음으로 지적되지 않았던가요. 역자는 누굽니까?
주:모르지요. 이북만그룹 중의 누구이겠지요. 중요한 것은 이 시의 내용입니다. 쫓겨가는 조선인노동자들이 다시 언젠가 해협을 건너 일본으로 쳐들어 오라는 것. 「그(천황)의 신변에 육박하고 그의 면전에 나타나 X를 사로잡아 X살을 움겨잡고 그의 X멱 바로 거기에다 낫X을 견우」라는 것.
객:이 시에 화답한 노래가 임화의 저 유명한 「우산받은 요코하마의 부두」(「조선지광」, 1929·9)이겠군요.
「항구의 계집애야! 이국의 계집애야!/독크를 뛰어오지 마러라 독크는 비에 젖었고/내 가슴은 떠나가는 서러움과 내어쫓기는 분함에 불이 타는데/오오 사랑하는 항구 요코하마의 계집애야…」
주:「너는 이국의 계집애 나는 식민지의 사내 너와 나 우리들은 한낱 노동하는 형제, 이국의 계집애야 울지마라 언젠가 다시 요코하마로 처들어가마」라고 읊었지요.
○민족차별대목 비판도
객: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였던가요.
주:나카노의 시 속에 포함된 다음 대목, 「조선의 사나이요 계집애인 그대들/머리끝 뼈끝까지 꿋꿋한 동무/일본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압잡이요 뒷군」
객:어째서 조선노동자가 일본무산계급의 「압잡이고 뒷군」인가? 기껏해야 일본무산자의 이용물에 지나지 않는단 말인가. 이것이야말로 민족차별이 아니겠는가!
주:많은 사람들이 이 대목을 들어 비판했지요. 나카노 자신도 자기의 오류를 솔직히 시인한 바 있습니다. 저도 모르게 저질러진 무의식적인 민족차별의식의 드러냄이었던 것.
객:문학이야말로 정직하도록 무섭다는 사실이 하나의 역사적 사실로 드러난 셈입니다.
주:지난해 방한한 오에 겐자부로(대강건삼랑·94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자)씨의 발언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자기 작품 속의 반한적 대목을 지적당해 당혹했다는 것. 의도적일리 만무하지만 자기는 일본인이라는 것. 일본인의 무의식 속에 반한감정이 있었을지 모른다는 것.
객:문학이란 그러니까 꽤 쓸만한 물건이군요.<문학평론가·서울대교수>문학평론가·서울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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