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시작된 모양이다. 비만 좀 왔다 싶으면, 피해소식이 홍수를 이루고, 우기 특유의 불쾌지수는 사람들 사이를 더 지치게 하니, 장맛비 반길 이가 뉘 있을까? 그렇지만, 자연을 거스를 수는 없는 일. 우리가 이 생에서 누릴 복이 「여름날 장맛비에 물 불어나듯」 늘어나기를 기원하는 노랫말이나 떠올리며, 슬기롭게 우기를 넘겨볼 일이다. 그런가 하면, 전통가곡 「바람은 지동치듯 불고, 궂은 비는 담아 붓듯이 오는」의 굳은 사랑의 맹세도 새로운 맛으로 들어봄직 하다.「바람은 지동치듯 불고, 궂은 비는 담아 붓듯이 온다/눈 정에 걸은 님을 오늘밤 서로 만나자 하고, 판 툭쳐 맹서받았더니/이러한 풍우 중에 제 어이 오리, 진실로 오기곳 오량이면 연분인가 하노라」 여창가곡으로 비교적 빠른 템포로 부르는 이 노래는 노래 전체에서 「연인을 기다리는 여심」이 느껴지곤 했다. 그런데 옛 시조를 모두 한 데 묶어 놓은 시조집을 보면 바로 이 여인이 기다리던 이가 조선후기의 명가객 안민영이 아니었을까 싶어 더 재미있다. 「가곡원류」의 공동저자이기도 한 안민영은 서울뿐 아니라 전국을 주유하며 당대 저명한 풍류가인들과 어울렸는데, 그는 음악생활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맺은 사랑에 대해서도 숨김없이 기록을 해놓았다. 안민영은 전북 남원에 머물 때에 음률이 뛰어나고 자색이 고운 명옥이라는 명기와 몇번의 만남을 갖다가 어느 날 밤에 만날 것을 약속하였는데, 그야말로 풍우대작하여 밖에 나서기조차 어려웠지만, 이미 언약한 일인지라 비를 무릅쓰고 사랑의 약속을 지켰다면서 이런 시조를 남겼다. 「바람은 안아 닥친 듯이 불고/궂은 비는 담아 붓듯이 오는 날 밤에/님 찾아 나선 양을 웃을 이도 있거니와/비바람 아녀 천지 번복하여든 이 길이야 아니하고 어찌 하리오」 장마비 쏟아지는 날 여창가곡 음반에서 곱고 투명한 소리로 사랑의 맹세를 노래하는 「바람은 지동치듯」을 골라 들으며, 장마철의 우울을 말끔히 씻어내는 여유를 함께 나누고 싶다.<국립국악원 학예연구관>국립국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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