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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에 충만한 생명의 소리(박경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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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에 충만한 생명의 소리(박경리 칼럼)

입력
1996.06.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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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에 몰려드는 새소리 개발에 쫓긴듯 슬프기만/풀을 뽑으며 깨달은 이치/대붕이나 쥐벼룩이라도 삶의 궤적은 같다는 것/문명이 가져온 물질주의 한없이 생명들을 압박 사멸을 재촉하지만서울에서 원주로 내려오려 했을 때 내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이 반대였고, 이삿짐을 실었을 때 친구들은 1년을 배기나 보자고들 했다. 그러나 어느덧 원주에서 15년 가까운 세월을 보내고 말았다. 원주라기보다는 어느 도시의 변두리, 개나리 울타리에 둘러싸인 어느 공간이라 해야 할 것 같다. 거의 외부와의 소통이 없는 생활이고 보면 내 거처 밖은 그냥 세상일 뿐 서울, 원주하며 지역을 말하는 것도 무의미하다. 그러나 「토지」가 끝나면서부터 조금씩 세상을 내다보기도 하고 더러 나다니기도 했는데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해방감같은 것은 손톱만큼도 느껴보지 못했다. 화려하고 편리해진 세상, 문명의 혜택으로 모두들 세련되고 풍요해 보이고, 그러나 무슨 까닭인지 사람들은 숨이 차게 바쁘고 시간에 얽매인 노예처럼, 이율배반이다. 이율배반은 또 있다. 붕괴를 촉발할 것만 같은 위험이 도처에 깔려 있는 사회구조는 복잡하고도 혼란스러운데 사람들은 규격품같이 단순하게 사고한다는 점이다. 그러한 단순성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어느 학생이 한 말이지만 지뢰밭같은 대인관계는 긴장과 피곤, 심한 갈증에 시달리게 한다. 편리하고 풍요로운 세상인데 어째서 이다지도 각박해졌을까. 모순이란 항상 있어 왔고 역사의 고비마다 그런 현상은 다소간 있게 마련이지만 총체적으로 극대화되어 지구는 병들어 휘청거리며 문명을 기본으로 한 물질주의는 한없이 생명들을 압박하고 초라하게 하며 사멸을 재촉하고 있다. 밤낮 없이 대권노래만 부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쇠귀에 경읽기같은 얘기지만 하여간 각설하고, 손톱만큼의 해방감도 느껴보지 못했다고 했는데 요즘도 만나는 사람 중에는 가끔, 긴 집필을 끝내어 얼마나 홀가분한가, 이제는 좀 편안하게 살아라, 그런 말을 하곤 한다. 그러나 그 따뜻한 말에 대하여 내 처지가 전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막연하게, 멍청하게 생각해보기도 한다. 그리고 도대체 나는 어느 지점으로 회귀하였는가 물어보기도 한다.

편안한 노년이라는 말에는 나도 무관심할 수는 없다. 내 자신이 노년이기 때문이다. 편안한 노년, 그것도 일부 소수만이 누리는 것이지만 적당히 운동하고 뭔가 한 가지쯤 취미를 가지며 가끔은 가까운 사람들끼리 외식을 하고 차림새에도 신경을 쓰며 국내 혹은 해외여행도 해보고, 대강 이 정도가 편안한 노년의 모델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삶일까. 그럴 수 밖에 없는 노약자의 피동적 처지라는 것은 물론 안다. 잉여시간에서 오는 멀미같은 것 , 중심에서 벗어난 객관적 인생, 시각적인 것만 남겨져 있는 듯, 어쩔 수 없는 비애다. 그러나 한 개인의 삶에는 모델이 없다. 불행이든 행복이든 자기존재에 대한 깊은 인식이야말로 진정한 삶이 아닐까.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밖으로, 밖으로 나가는 사람도 있겠고 내 경우는 집 안보다 집 밖이 외로웠다. 황량함도 집 밖에 있었다. 안과 밖이라는 개념도 실은 명료한 것이 못되며 편의상의 안팎을 넘어서 각기 자신들의 공간이라 하는 편이 합당할 것 같다. 자기 세계라 해도 무방하고 추상적 공간일 수도 있다. 여기서 우리는 개체의 냉혹함과 치열함을 본다. 타자와의 관계는 그야말로 관계일 뿐 일체가 될 수 없다. 다만 일체라는 것을 관념적으로 시인하지만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그러나 문학은 일체가 될 수도 있고 그림자가 될 수도 있다. 삶이 구체적인 현실이요 문학은 추상적 상상일지라도. 언제였던지 영화에서 보았는데 흰 빛의 짧은 내리다지를 입은 화가 고흐가 창 밖에서 조롱하는 아이들을 향해 팔짝팔짝 뛰던 장면은 지금도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다. 그는 명예를 갈망했을까? 돈을 갈망했을까? 생존(자유)을 위해 얼마쯤은 필요했을 것이다. 묘하지만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 다시 떠오르는 것은 그림은 그에게 무엇이었을까 하는 물음이다. 해방과 자유와 생존, 새를 볼 때 특히 그 세 가지 말이 하나로 통합되는 것을 느낀다. 새 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에게 다 해당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며 모든 생명들의 원형질로서 예술가는 그것에 대한 그리움을 전제로 하며 본질을 탐구하고 표현하는 사람, 하여 자유에의 갈망은 그리고 싶은 갈망과 같고 존재의 본질에 대한 갈망과도 같은 것이다. 내리다지의 그 우스꽝스런 모습은 무구(무구)한 자의 슬픔이었고 남의 귀를 자를 수 없어 내 귀를 잘라버린 순전한 그를 사람들은 광인이라 했다. 자살하기 전까지 그림을 그렸던 그는 정말 광인이었을까?

○“왜 혼자 사는거요”

「토지」가 끝났을 때 나는 성취감같은 것을 느끼지 못했다. 지친 때문이라 생각했으나 그게 아니었다. 이제 토지는 영영 떠나버렸구나, 일종의 상실감이었다. 그런데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개나리울타리에 둘러싸인 곳, 생명의 소리들이 충만해 있고 흙도 숨을 쉬며 억조창생, 생명들이 술렁이던 터전, 농약 없이 가꾼 뜰이며 밭이며, 또 그것들은 나를 먹여 살렸고 서로 참 자알 살았는데 개발 때문에 터전을 잃게 된 것이다. 동시에 나와 일체였던 두 개를 잃고 보니 내 자신 공중분해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곳은 15년간 자유를 얻기 위한, 내 심정으로는 격전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불리한 처지에서, 자유는 항상 불리한 처지에 있는 것이지만 혼자 있는 여자, 그것도 사양길에 들어선 여자, 그것부터가 초라하고 무력한 풍경이다. 특히 이 나라 풍토에서는 그 편견의 골이 너무나 깊어서 간데 없는 죄인이다. 감시를 당해야 하는 죄인, 사람들은 새로운 도약을 꿈꾸면서도 상식에서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하며 상식에서 벗어난 것에 대해서는 증오심을 갖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특히 대상이 여자일 때는. 『여자가 글은 써서 뭘해』 사회적 인식이 그러했던 시기에 출발했기 때문에 내가 과민했는지. 여하튼 여자가 혼자 산다는 것은 무방비의 성곽이요 심하게는 저주다. 일상의 불이익이나 상처받는 일을 거론하자면 끝이 없고 늘어놓는다면 천박한 신세타령이 될 것인즉 긴 말은 않겠으나 예를 들어서 일꾼에게 일을 시키면 농땡이를 부리고 시설물을 설치할 때, 집수리할 때는 바가지 씌우기 일쑤다. 한번은 장마에 연탄이 무너져서 200여장이나 깨졌는데 연탄가게 종업원 왈 『어디다 버릴까요』 거저 가져가려고 능청을 부린 것이다. 『당신 어느 나라 사람이오, 버리라고 광부들이 연탄 캐내는거요?』하고 응수했지만 인간적인 접근보다 세로써 좌우되는 현실은 정말 나를 눈물나게 했다. 『자식은 없어요? 왜 혼자 사는 거요』 『참 안됐소. 근력은 좋으시우』 야박한 입들은 동정과 우월감과 얕잡아보는 기색을 별로 감추지도 않았다. 언젠가는 양계장에서 계분을 구입한 적이 있었다. 손가락 몇 개가 잘려나간 음성환자인 중늙은 남자가 트럭에 계분을 싣고 왔는데 이 많은 계분 어디다 쓰느냐, 과수원 하느냐고 물었다. 나무랑 밭에 줄려구요, 땅이 죽어가는데 유기농업을 해야지요, 하고 말했더니 시골노친네가 제법 유식하다며 담배를 꼬나무는 것이었다. 『예, 풍월은 좀 알지요』 생광스런 남자들, 사위도 있고 손주들도 있고 그들이야 불러대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지만 주변에 아는 사람들이 없지도 않아 동원하려면 못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설사 안다 하더라도 별볼일이 없겠으나 내가 누구인가를 과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겸손하기 위하여, 수양을 쌓기 위하여 구구로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누구노라 하기에는 쑥스럽고 치욕스러워 못했지만 물론 생광스런 남성들을 동원하지도 않았다. 세상에 대가 없는 것은 없다. 불이익이나 자존심 상하는 것 쯤, 자유를 위해 지불하는데 값비싼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시설물이 고장나면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고 힘에 겨운 일도 내자신이 감당하게 되어 농사, 노동에도 이골이 났으며 어김 없이 그것에서도 나에게 대가가 돌아왔다. 달마대사같은 성인은 소림사에서 9년 면벽하여 깨달음을 얻었다 하지만 범인은 가만히 있으면 생각이 정지된다. 노동은 심신을 상쾌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끝없는 생각 속으로 나를 끌어들인다. 노동과 글쓰기와 나는 삼발이같은 것이었다. 글을 쓰다 막히면 밖에 나가 풀을 뽑고 그러다 보면 생각이 떠오르고 막혔던 것이 뚫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연의 이치, 사람 살아가는 이치를 조금씩 깨닫게 되었으며 불평등은 인간의 소위로서 자연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 대붕(상상의 새)은 쥐벼룩이 너무 작아서 볼 수 없고 쥐벼룩은 대붕이 너무 커서 볼 수 없지만 삶의 궤적은 한치 오차 없이 동등하다는 것, 자연의 공평함 오묘함, 실로 돈으로는 환산될 수 없는 내 세계, 나와 더부 살았던 많은 생명들의 세계, 이미 그것은 내 소유에서 떠나버렸다.

○꿩·뻐꾸기도 찾아와

그러나 다행하게 토지공사에서 집을 보존한다 하니 고맙고 또한 내가 지급받은 보상금을 합하여 풍광이 좋은 산 속에다 토지공사에서 문화관을 짓게 되었으니 기업의 새로운 인식, 문화에 대한 인식이 고맙다. 실은 기념관이다, 문화관이다 하는 것이 직접으로는 나와 관계가 없고 후일을 위한 것인 만큼 내가 그 일에서 마음이 떠나 있어도 무방한 일이지만 솔직히 말하여 토지공사에서 거금을 내놓았다는 것, 그간의 사정을 세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일이 절로, 그것도 아주 빠르게 굴러왔기에 정신을 차릴 수 없고 내가 얽매이는 것이나 아닐까 더럭 겁이 나고 불안하여 어딘지 모를 곳을 헤매는 기분이다. 하루 빨리 내 자리를 찾아 돌아가야지, 호미 한 자루 들고 밭고랑을 매더라도 나는 자유로워야 한다, 되뇌이며 몹시 초조해진다.

요즘은 머지않아 떠나야 할 이 곳에 이상하게도 소리의 향연이 벌어졌다고 표현해야 할지 아무튼 전에 없이 갖가지 새들이 모여든다. 자두나무가 없어지면서 모습을 감추었던 꾀꼬리를 비롯하여, 뻐꾸기도 뜰안 나무 꼭대기에 와서 그 모습을 드러내어 처음으로 볼 수 있었는데 웬 새들이 이렇게 많이들 찾아오는 걸까. 알고 보니 개발로 숲이 없어지게 되니 그런 모양이다.

그러나 사방에 충만한 생명의 소리를 듣는 것이 반갑지 않고 몹시 괴롭다. 10여년 전, 기르던 꿩들이 도망하여 울타리 밖 숲에서 살았는데 꿩이 우는 소리를 들으면 아직 살아 있었구나 싶어 반갑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꿩 우는 소리에 가슴이 아프다. 어디 가서 저 새들은 새로운 보금자리를 만들 것인가 싶어서. 해방도 자유도 생존도 어렵게 된 새들, 생명이 누추하고 초라하며 갈 곳이 없고 먹을 것이 없어, 뻐꾸기까지 인가를 찾는 모험을 아니할 수 없는 현실, 까치는 고양이밥을 훔쳐 먹고 신새벽에 나타나 베어다 땅에 방치해둔 콩을 훔쳐 먹다가는 사람소리에 꽁지가 빠지게 달아나는 꿩의 모습, 먹이를 구하기가 어렵게 된 꿩이 그나마 그 콩 때문에 겨울을 났나 싶어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어찌 될지 모르지만 하여간 노는 땅에 금년에도 콩을 심기는 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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