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행국회」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타나기만 하면 저절로 손이 신문의 다음 장으로 간다. 여와 야의 총무가 화면에 등장하면 즉각 시선이 리모컨을 찾는다.당선자중 과반수 이상이 정치신인이라 기대를 걸만 하다는 평가가 나온지 불과 두 달만에 국민은 다시 냉소와 불신을 키우고 있다. 신인들까지 국회 안에서 서로 티격태격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그러면 그렇지』라고 중얼거린다. 그러나 그러한 국민의 비판은 구체적 타깃을 찾지 못하고 단순히 한탄의 수준에 그치고 있다.
국민이 처음부터 이처럼 할 말을 찾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무소속 당선자가 잇따라 신한국당을 기웃거릴 때 상당수의 국민은 인위적 정계개편의 부당성을 서슴없이 지적하였다. 무소속의 당적 취득은 총선에서 나온 민의를 저버리는 행위라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게다가 선거부정에 대한 검찰의 수사가 시작되는 시점에 무소속이 대거 신한국당을 찾은 탓에 일부 국민은 「동기」에 대한 최악의 의혹까지 품게 되었다. 무소속은 사정의 채찍이 두려워서 신한국당을 선택하였고 여당은 여소야소의 정국이 불안해서 검찰을 「무소속몰이」의 수단으로 동원하였다는 비판이 사회 일각에 퍼졌다.
○되레 말문이 막혀
따라서 국민은 검찰의 불편부당성을 보장하고 국회 차원에서 선거부정을 파헤쳐야 한다는 야권의 주장에 일정 부분 동조하고 있었다. 사정이 야당의 참여없이 진행되다가는 편파수사로 흘러버릴 위험성이 적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여론은 여당에만 불리한 상태로 오래 남아 있지는 않았다. 야권이 정계개편에 맞서 취한 초강수가 비판할 타깃을 흐려놓았다. 일단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검찰과 선거사정의 문제를 국회 개원과 연계시킨 다음부터는 야당 역시 여론비판의 타깃이 되어 버렸다. 원구성마저 정쟁의 볼모로 전락하다가는 한국민주주의의 장래가 밝을 수 없다고 국민이 판단한 것이었다.
게다가 야권의 동기에 대한 의혹마저 생겨났다. 총선 직후에 야권은 선거에서 부진을 면치 못한 원인을 따져보자는 「책임론」에 시달리고 대권주자를 백지상태에서 다시 생각해보자는 「세대교체론」에 휘말릴 조짐을 보였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나온 야권수뇌부의 초강수는 관심의 초점을 여야관계로 맞추고 야권 내부에 위기의식을 불러 일으켜 수뇌부 자신의 위상을 지키려는 조치로 보이기에 충분하였다. 야권 역시 여당처럼 국민의 의혹을 사는 행동을 취한 것이었다.
국민이 국회의 정상화에 기여할만한 생산적인 비판의 논리를 찾지 못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각각의 의혹이 진실이라면 정국경색의 책임을 놓고 여야 사이에 잘잘못의 우열을 가릴 수 없었다. 여야 모두가 잘못이라는 「양비론」이상의 비판이 불가능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양비론은 생산적이지 못하였다. 파행국회는 「카리스마」끼리 펼치는 오기와 감정대결의 정치적 악순환 때문이라는 판단은 서지만 무슨 말부터 꺼내서 어떠한 해결의 단서를 제시할지가 막막하였다. 여당을 탓하려면 야당의 잘못이 생각나고 야당을 비판하려면 여당의 부당한 행위가 기억나서 오히려 말문이 막혔다. 그러다 『말은 해야 한다』는 생각에 꺼내는 것은 기껏해야 정쟁의 장본인인 여야수뇌부가 국회정상화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점잖은 「결자해지론」이었다. 이어 이러한 충고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할 때에는 『정치권 전체가 다칠 것』이라는 「공멸론」을 넌지시 내비쳤다.
그러나 그러한 비판에는 힘이 없었다. 오히려 여야의 수뇌부는 양비론과 공멸론이 확산되는 가운데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였다. 신한국당은 과반수 의석의 확보에 성공하였고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수뇌부는 책임론과 세대교체론을 조기에 잠재울 수 있었다.
○원칙부터 세워야
한국정치의 현주소를 다시 한 번 생각케 하는 대목이다. 「무원칙의 권력정치」는 공멸을 자초할 무리수라는 것은 상식이 통하는 「보통사람」의 생각일 뿐이었다. 한국의 「정치유단자」가 믿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한국적 현실에서 권력자가 자신의 위치를 지키는 최선의 전략은 여야 모두가 다치는 최악의 상황을 연출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양비론이 국민 사이에 확산되어 당사자 모두의 약점을 상쇄시켜주고 공생의 가능성을 높여 놓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양비론과 공멸론에서 헤어나지 못 한채 부지불식간에 카리스마 중심의 기존 정치질서를 오히려 강화시키고 있다. 한국적 상황 하에서 시시비비를 가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정작 국민이 나서서 해야 할 것은 『국회는 제때 열려야 한다』는 원칙을 세우는 일이다. 원칙이 생겨나면 최소한 미래의 한국사회만은 건전한 민주적 삶을 누릴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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