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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성/정조대왕의 효심 절절이… (문화유산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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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성/정조대왕의 효심 절절이… (문화유산을 찾아서)

입력
1996.06.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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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은 효의 도시라 불린다. 정조대왕의 부친에 대한 효성심이 가득한 고장이란 뜻이다. 조선후기 개혁정치를 주도했던 정조는 즉위 13년째 되던해 뒤주속에 갇혀 무참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한을 풀고자 한강이남에서 최고의 명당이라는 화산 기슭으로 묘를 이장했다. 그리고 그아래 자리잡고 있던 수원을 현재의 팔달산 기슭으로 옮기고 서울에 버금가는 신도시를 건설했다. 여기에 임금의 임시거처인 행궁을 짓고 이를 옹위하는 총길이 6㎞에 달하는 성곽을 축조했는데 이는 건설역사상 서울건설이후 가장 대규모의 사업이었다.이름하여 화성성역사업이라 불리는 이 대역사는 1794년 정조 18년 정월에 시작, 낙성식을 갖기까지 불과 34개월이 소요됐다.

수원성에 대한 정조의 남다른 열정과 당시 중흥기를 맞았던 18세기 조선왕조의 모든 문화적 역량이 투입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정조는 화성성역사업의 표면적인 이유로 부친에 대한 효심을 내세웠지만 그 배경에는 훨씬 복잡하고도 의미심장한 정치적의도를 갖고 있었다.

당시 서울은 구신들의 근거지였고 경제권도 노론을 중심으로한 기존정치권이 장악하고 있었다. 정조는 기존정치권을 약화시키고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을 통찰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무덤을 최고의 길지에 모신다는 명분과 함께 자신을 뒷받침할 경제적인 힘을 확보하고 왕권의 위엄을 만천하에 내보이기 위해 수원성역화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더욱이 수원성의 설계와 공사를 그당시 새로운 사고를 가지고 있었던 다산 정약용과 같은 실학파학자들이 담당했다. 그러므로 수원성은 정조의 야심찬 포부와 함께 새로운 시대정신이 결합하여 만들어낸 18세기 문예부흥기 최고의 성과이자 상징이라 할 수 있다. 교통편은 남부터미널에서 수원가는 버스를 타고 팔달문에서 내린다. 지하철은 종각역에서 수원행열차를 탄다.<이형권 역사기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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