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긋하고 시원해 보이는 여름용 침구에 이끌려 이불가게에 들어가 본 적이 있다. 침구뿐 아니라 함, 패물상자, 각종 비단보자기등 주로 혼수를 취급하는 가게였고 마침 혼수이불을 상의하러 온 고객들로 붐비고 있어 주인은 그냥 눈요기나 하려는 나같은 사람은 잘 상대도 안하려 들었다. 덕택에 딸 가진 어머니와 장사꾼의 수작을 낱낱이 엿듣지 않으면 안되었다. 장사꾼이 더 비싼 물건을 더 많이 팔려는 건 당연하지만 그 방법이 좀 지나친 것 같았다. 신랑자리의 직업, 신랑집의 사회적 신분은 물론 연애결혼인가 중매결혼인가, 같은 연애라도 남자쪽에서 더 반한 연애인가, 여자쪽에서 죽고 못살 것처럼 덤벼서 마지 못해 성사된 혼사인가까지 탐색해가며 혼수의 가짓수와 질을 늘리고 높이려 들었다. 그러나 정작 신부측의 형편에 대해서는 전혀 배려가 없는 것은 세리보다 더 인정사정없어 보였다.○신부쪽의 참담함
그들이 그렇게 당한 게 어찌 이불집에서 뿐이었을까. 참담하게 일그러지고 지쳐보이는 신부측 여인들의 표정을 보면서 딸 가진 죄인이라는 말은 아직도 명언이요 진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래가지고서야 누가 아들을 바라지 않겠는가. 예전에는 여러 남매중 한 두명의 딸자식은 교육비나 양육비는 헐하게 먹히고 어려서부터 잔심부름등 가사노동력을 제공해준다는 이점이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세상도 아니다. 아직도 밑천을 뺄 가망은 남자에 비해 현격하게 떨어지건만 교육비는 동등하고 치다꺼리하는 수고는 오히려 딸자식이 더 든다. 대를 잇는다는 유구한 지상의 명제를 핏줄을 잇는다는 생각으로 바꿔가면서 애지중지 딸을 키운 부모라도 혼인을 시킬 때 섭섭한 것 이상으로 열패감을 맛보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방법이 없다면 모를까, 있다면 이왕이면 아들을 낳고 싶을 것이다. 세상 또한 인간의 가치도 경제적 우열로 자리매김되는 자본주의세상이 아닌가. 손해나는 짓을 안하겠다는 사람에게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봤자 먹혀들리 만무하다.
봄에 손녀가 초등학교에 입학을 해서 며칠 따라다녀 보았다. 손자들 때는 별로 못 느꼈는데 성비의 불균형이 통계로 나타난 것보다 더 심각한 게 눈에 띄었다. 딸만 둘을 두었다는 엄마가 저 애들 혼기에는 남자가 열쇠 3개를 가져오지 않으면 딸을 안 내주는 세상이 올거라는 식의 장담을 했다. 그 엄마도 맺힌 게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엄마가 바라는 앞으로의 세상도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평등하고 편안한 세상이지 결코 여자들이 당한 걸 앙갚음하는 세상은 아닐 것이다. 돈을 많이 받고 딸을 내주게 된다면 아직도 후진사회에 남아 있는 매매혼과 다를 게 없다. 그런 사회일수록 여성의 지위가 열악하다는 것도 유념해둘 필요가 있다. 앙갚음은 될 수 있을지는 모르나 어찌 앙갚음따위를 만복의 근원이라는 이성지합에서 써먹을 것인가. 또한 딸을 열쇠 3개에 해당하는 값을 받고 내주는 세상이 온다고 해도 딸은 남을 준다, 즉 남의 집안에 속하게 한다는 것으로 역시 평등관계는 아니다.
○기득권자가 먼저
어떻게 하든지 아들 하나는 있어야 하겠다는 부모의 집념과 의술이 합작을 해서 이룩한 남초현상이 미래사회에 어떤 화근을 몰고 올지 우려하는 소리가 높아지는 가운데 태아의 성별검사를 반성하고 자제하려는 의료계의 움직임도 눈에 띄는 요즈음이다. 그보다 앞서 법이나 제도에도 많은 변화가 있어서 여자라고 해서 불이익을 당하는 일이 꾸준하게 개선돼왔다. 그러나 태중의 딸자식을 살해하면서까지 아들을 갖고 싶어 하는 광기가 딸은 남을 주고 아들은 남의 자식을 데려온다는 유구한 전통에 뿌리내린 이상 법과 제도보다는 우리의 관습을 하나하나 점검해나가야 할 줄 안다. 하다 못해 아이가 태어났을 때 우리가 하는 말버릇서부터 결혼풍습에 이르기까지. 아들이나 딸이나 성인이 되면 똑같이 부모를 떠나 이성과 한 몸이 되어 새로운 가정을 이루고, 그 새로운 가정이 부모 보기에 예쁘고 대견하고, 자나 깨나 잘 되기를 기원해 마지 않는 보람이라는 걸로 양가사돈이 동등할 때 혼수나 예단으로 이득을 챙기려는 한탕주의 비슷한 세도도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걸 주도하는 것은 역시 기득권자인 아들가진 쪽이어야 하지 않을까. 아들도 소용없더라, 결혼시키면 남되는 게 딸보다 더 하다는 말도 있고, 바로 그런 까닭으로 결혼할 때라도 아들세도를 실컷 부려야 한다는 소리도 있다. 그러나 결혼때 며느리에게 해도 너무한다 싶게 심하게 바란 시가식구일수록 그 후 효도를 못 받는다는 것도 명심해둘 필요가 있다. 며느리가 그 정도는 앙갚음을 할줄 알게 됐지만 그것 또한 바람직한 방법은 아니다. 아무리 부패한 사회도 혁명이 최선의 방법은 아닌 것처럼.<박완서 작가>박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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