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의 상상력으로 문화 산업의 불모 그려박상순의 「마라나, 포르노만화의 여주인공」(세계사간)은 제목과는 달리 전혀 외설적이지 않다. 이 야릇한 제목의 기능은 아주 엉뚱한 데에 있다. 즉, 시인은 이 제목을 통해 자신의 시를 「동시」로 읽지 말아달라고 독자에게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포르노만화가 성인만화인 것처럼, 이 시집도 성인시집이라는 것이다.
실로, 이 시집에선 동시집으로 착각될 만큼 어린이의 상상력이 특히 돋보인다. 이를테면, 돌을 먹고 펭귄이 된다거나, 멍이가 망이를 계단에서 밀었더니 망이는 「목발을 짚고 하얀 달 일곱 마리와 나타났다」거나, 상자를 「쓱싹 한 순간에」 그려놓고 「거대한 방/수많은 방으로 이루어진/거대한 방」이라고 말하거나 하는 식이다. 이런 상상력을 우리는 「어린 왕자」에서 보았거니와, 그것은 모든 사물들 사이에 무한한 친화력을 흐르게 하는 천진난만한 무차별, 무분별의 상상력이다. 분별지를 버리는 것만큼 상쾌하고 즐거운 것은 없다. 가만히 보면, 시집의 제목도 썩 즐거운 놀이의 결과이다.
시인은 왜 이런 놀이를 즐기는 것일까, 이름마다 차별이 있고 틈새마다 구획이 있는 이 세상에서? 「어린 왕자」의 경우엔, 이런 분별지의 세상에 저항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즐거운 세상도 있다는 것을 불쾌가 미만한 세상에 보여주는 것. 「어린 왕자」는 보기와는 달리 강력한 행동문학이다. 「마라나…」는, 그러나, 「어린 왕자」를 따르지 않는다. 시인이 보여주는 것은 무차별 상상 그 자체의 자기파탄이다. 「한쪽 기차가/외줄 철로 위에서/다른 한쪽에서 달려오는 기차를 들이받았습니다/끝입니다」같은 구절을 보라. 장난감 기차라면 그냥 끝이겠으나, 이게 성인시집 속의 성인세계라면 어떤 끝이겠는가? 또는, 「수반의 뒤뜰에서 뿌리째 걸어나와/쓰러진 나를 업어 잠재우던 앵두나무/나는 그 앵두나무를 던졌다」. 앵두나무는 나를 업고, 나는 포클레인을 부르고, 포클레인은 구덩이를 파고, 그리고 「이제 앵두나무는 나를 발명하지 못한다/발견하지 못한다」. 이 무한한 순환은 어느새 자멸의 구덩이를 파고 있다.
그 상상력은 석녀의 상상력이다. 무한치환의 놀이는 실은 새로움을 흉내낼 뿐인, 어떤 새로움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진부하고 지겨운 놀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정말 어린이의 상상력일까? 성인시집 속에서 이것은 어린이를 흉내내는 문화산업의 상상력이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 시인은 문화산업의 상상력을 흉내내어서 그것의 자기파탄을 짚어나간다. 「대충 그럴싸한 그림엽서를 흉내내어서/아무렇게나 상대방의 인생을 늘어놓는」 그 문화산업, 시인 스스로가 속해있고, 모든 남녀노소가 때마다 탐닉하는 그 모든 광고와 카피와 디자인들의 무한대체의 수사학. 그것은 한 번도 새로움을 가져온 적이 없다. 새로움을 탐식할 뿐이다. 「마라나…」는 바로 그것의 불모성의 비애를 보여준다.<문학평론가·충남대교수>문학평론가·충남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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