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이 오면 전쟁의 상흔들이 가슴이 메어지게 한다. 아직도 정리되지 못한 전쟁얘기들이 많기 때문이다. 24일 서울 강서구 방화동의 개화산중턱에서는 지금껏 잃어버린 부대로 알려졌던 육군 제1사단 12연대 3대대의 전몰현장이 밝혀져 당시의 전우들이 참석한 첫 위령제를 지내는 행사가 열리게 돼 아직도 정리해야 할 6·25전장이 많이 남아있음을 확연히 보여주고 있다.이 부대는 38선접경의 연백지역을 지키다가 50년 6월25일 개성후퇴로 대신 바다를 건너 김포지구로 후퇴해 개화산에 방어진을 치고 전투를 벌이다가 6월30일께 인민군의 화력과 수에 밀려 결국 부대원 전원이 개화산 골짜기에서 최후를 맞았었다. 본부와의 연락이 끊어진 채였고 마지막 한발의 총알마저 다 소비한 상태였다. 무려 920명이 이 골짜기에서 전사했다. 그러나 전쟁이 멈춘지 40년이 지나도록 아무도 이 부대의 행방을 찾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잃어버린 부대로만 알고 있었다.
당시 1사단장이었던 백선엽장군의 회고에 따르면 12연대는 임진강다리를 건너 후퇴하기로 돼 있었는데 26일 정오께 피투성이가 된채 지프에 실려온 연대장 전성호대령을 비롯한 40여명이 후퇴병력의 전부였고 그뒤는 바로 인민군이 따라붙어 12연대는 거의 전멸한 것으로 알았다. 전성호연대장은 뒤에 영덕전투에서 전사했다. 개화산 주변의 얘기를 들어보면 12연대3대대는 바다로 철수해 김포비행장을 거쳐 거기서 일부병력과 합류한후 26일 개화산에 들어와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그러나 3대대를 뒤쫓은 인민군이 곧바로 개화산을 포위해 전투를 벌였으며 28일밤까지 버티다가 본부와의 통신이 끊어진채 탄약과 보급이 떨어져 전원 전사했다. 육사2기생인 대대장 김무중소령의 지휘아래 920명이 싸우다가 한사람도 남지않고 모두 전사했던 것이다. 백선엽의 회고록 「군과 나」에 따르면 백선엽은 육군본부의 후퇴명령이 없어 서울이 인민군에 점령당한 28일에도 봉일천에서 싸우다가 그날밤 행주나루터에서 나룻배를 얻어타고 한강을 건넜는데 야밤인데도 김포방변에서 총소리가 요란하게 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마도 3대대병력의 마지막 방어전이었을 것이다. 그후 12연대는 김점곤대령의 지휘아래 전열을 정비한후 그 유명한 다부동전투를 치렀고 북진해서는 최초의 평양점령부대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3대대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4년전 개화산 미타사 주지로 온 송강스님이 꿈에 피를 흘리면서 죽어가는 군인들의 환상을 자주 보게 돼 이 동네 원로들과 얘기를 하면서 3대대의 전몰내력을 밝혀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송강스님은 양성춘씨(강서구 구의원)등과 협력하면서 2,500만원을 모아 지난해 이곳에 무명용사위령탑을 건립하게 됐고 이 사실을 알게 된 12연대 전우친목회에서 이번에 처음으로 위령제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12연대 친목회 총무 곽병환씨는 위령제를 지낸후 전사자이름을 밝혀내 다시 명패를 새기고 40년간 고혼이 돼 외롭게 떠돌던 3대대전우들의 충혼을 기릴 것이라고 말했다. 군 명령하나로 외롭게 죽어간 군인들이 12연대 3대대뿐이겠는가. 그러나 우연하게나마 찾아낸 3대대만이라도 전사자이름을 밝혀내고 훈장을 수여할만하면 훈장을 달아 그들이 사랑했던 아내와 자녀, 부모형제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국가의 국가된 도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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