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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 「한국보훈대상」 영광의 얼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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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 「한국보훈대상」 영광의 얼굴들

입력
1996.06.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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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역경속 나라사랑과 의로운 삶에 숙연·경의「23회 한국보훈대상」 후보로 추천된 분들의 공적을 심사하면서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하고 지탱하고 있는 이 분들의 의로운 삶과 나라사랑 실천에 숙연한 마음을 가다듬지 않을 수 없었다. 올해 호국보훈의 달에 즈음해서 국가보훈처와 한국일보사가 접수한 상이군경·미망인·유족유자녀·중상이자배우자·특별보훈 등 5개 부문의 수상 후보자는 모두 25명이었다.

한분 한분의 공적을 살펴보는 동안 참담했던 지난 역사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 살신성인한 선열들, 호국용사들과 그 배우자, 가족들에게 국민의 이름으로 감사하고 보답해야 한다는 생각에 몸둘 바를 찾기 힘들었다. 상이군경들은 전쟁의 상흔을 안은채 스스로 힘겨운 삶을 살면서도 실의에 빠져 마약중독에 젖어든 동료 상이자들을 선도하고 중상이자 용사촌을 건립, 새 삶의 터전을 일구었으며 장애의 웅크림을 털고 일어나 국제척수장애인 체육대회 등에 참가, 삶의 의지를 불태우는 등 정상인들을 부끄럽게 할 만큼 보람찬 삶을 창조하였다. 또 젊은 나이에 전몰군경의 미망인이 되어 가난과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한 가족을 훌륭하게 일으켜 세우고 주위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준 분들, 중상을 입은 남편의 손과 발이 돼 남편과 자녀·시부모를 향한 지극한 사랑을 꽃피운 중상이자 배우자들의 삶은 눈물겹고도 거룩한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아버지를 전쟁으로 잃은 유자녀로, 두 눈까지 실명한 아픔속에서도 장애인들의 어려움을 나누는 일에 평생을 바치며 더 어려운 이웃들을 돕고있는 감동적인 모습도 돋보였다.

특별보훈부문에서는 의병장의 후손으로 나라 안팎의 숨은 독립유공자들을 찾아 민족정기선양사업을 묵묵히 추진, 나라사랑을 후세에 전하는 참 애국자 상이 부각되었다. 참으로 이들이 있었기에 오늘이 있었으며 미래 또한 밝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올해로 23년째 「한국보훈대상」을 이끌어온 한국일보사에 감사한다.<백선엽 심사위원장> ◎고명곤씨(상이군경)/하반신마비 불구 전우들 복리에 힘써

고씨는 월남전 부상으로 인한 하반신 마비라는 신체적 어려움을 극복, 동료 상이용사들을 올바른 길로 이끄는데 앞장서 왔다. 68년 육군에 입대, 69년1월28일 월남에 파병된 고씨는 보병 9사단 30연대 9중대 소속으로 그해 8월16일 캄란지구 전투에서 전공을 세워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고씨는 그러나 이 전투에서 척추신경 하반신 마비라는 전상을 입고 69년12월27일 육군 상병으로 제대했다. 72년 당시 국립원호병원 중환자 모임인 일념회를 창립, 음주와 마약·폭력 등으로 방황하는 동료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데 앞장섰다. 75년에는 중상이자용사촌과 신생 인쇄조합 설립을 주도하는 등 동료 상이용사들의 복리증진에 힘써 2월에는 용사촌 회장에 추대됐다.

또한 79년 제28회 국제척수장애인 경기대회에 탁구 한국대표로 참가해 금메달 1개와 은메달 1개를 획득, 같은해 체육훈장 백마장을 수상했고 81년에도 같은 대회에서 금메달 1개를 추가하는 등 국위를 선양했다.

◎박종순씨(미망인)/삯바느질로 시부모·4남매 뒷바라지

29세인 6·25때 남편을 잃은뒤 어린 4남매를 훌륭한 사회인으로 키우고 연로한 시부모를 극진히 봉양 해왔다.

남편 고현규씨는 농협서기로 일하다 6·25가 일어나자 자원입대, 51년2월20일 경기 연천지구 전투에서 적의 직격포탄에 맞아 사망했다. 박씨에게 남겨진 것은 아들 셋과 유복녀 등 4남매와 연로한 시부모, 그리고 남의 땅에 지은 10평짜리 흙벽돌집이 고작이었다.

박씨는 낮에는 유복녀를 업은 채 두부와 콩나물장사에 나서고 밤에는 삯바느질을 하는 등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면서도 시부모가 좋아하는 막걸리와 담배를 하루도 빠짐없이 사드렸다. 4남매는 훌륭한 사회인으로 성장했고 시부모는 90세 이상의 장수를 누렸다.

71년부터 20여년간 마을 부녀회장을 맡아 폐품모으기와 생활쓰레기줄이기, 불우이웃돕기, 경로잔치 등 사회봉사활동에 앞장서 왔다. 73년부터는 대한민국 전몰군경 미망인회 천안시 지회장으로 일해왔다.

◎남기형씨(특별보훈)/의병장의 후손으로 애국지사 선양 앞장

독립유공자 남상목의병장의 후손으로 88년 10월부터 광복회 의전부장으로 재직하면서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의 얼과 고귀한 희생정신을 후세에 계승하는 민족정기선양사업에 열과 성을 다해왔다.

특히 지난해 문민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차원에서 추진됐던 상해임정요인 5위 선열 유해봉환 당시 직접 유해를 다루어 국립묘지에 안장하는등 거국적인 민족행사에 큰 몫을 담당했다.

그는 또 지난해 광복50주년을 맞아 치러진 각종 독립기념행사에서 숨은 주역 노릇을 했다. 특히 일제시대 당시 외국인으로서 한국독립운동에 가담했던 사람들을 처음으로 국내에 초청, 각종 추모·경축행사가 성사될 수 있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독립유공자 유족 상호간의 의리와 인정을 강조, 애경사때마다 현장을 찾아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있다.

◎정화원씨(유족·유자녀)/피란길에 실명한후 맹인들 위해 헌신

아버지 정정환씨는 6·25 당시 경북대학교에 재학중 학도병으로 참전, 24세의 꽃다운 나이로 전사했다. 어머니와 단 둘이 남게된 정씨는 군용트럭을 타고 고향인 경북 상주로 피란가다 포탄을 맞았다. 목숨은 건졌으나 눈에 파편이 튀어 12세때 완전히 실명했다. 수많은 좌절을 겪었지만 정씨는 실의를 딛고 일어서 시각장애인과 불우이웃을 위해 남은 인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73년 서울 맹아학교를 졸업한뒤 떠돌이 생활까지 해가며 배운 안마와 침술로 점차 명성을 얻었다. 부인도 무릎관절염을 앓던중 그가 직접 시술해준 인연으로 만나 반려자가 됐다. 그후 각종 시각장애인 관련단체장등을 역임하면서 부산맹인복지관과 맹인점자도서관, 심부름센터, 재활센터등 각종 맹인복지시설을 건립하고 한국맹인침구사협회를 발족시키는가 하면 심신장애자복지법 제정등에 크게 기여했다. 사회의 어두운 구석을 찾아 지금까지 각종 불우이웃단체등에 6,000여만원을 위문품과 장학금으로 지급했다.

◎옥봉순씨(중상이자 배우자)/23세때부터 불구남편 대신 가족봉양

남편 김갑식씨는 21세때인 51년1월12일 육군종합학교에 입교, 같은해 5월25일 경기 가평지구 전투에서 우측두개골골절및 뇌손상으로 좌반신불수의 중상을 입었다. 남편은 52년12월 육군대위로 전역했다. 시부모 또한 화병을 얻어 병석에 누웠다. 23세 꽃다운 나이의 옥씨에게는 너무나 큰 시련이었다.

그러나 옥씨는 불구인 남편과 화병으로 몸져누운 시부모를 극진히 간호했고 2남3녀의 자녀들을 성공적으로 키워냈다.

70년부터 마을 부녀회장을 맡아 구판장을 설치, 수익금으로 마을의 길흉사를 지원하고 부녀회원들과 절미운동을 벌여 어려운 가정에 쌀을 제공하는등 불우이웃돕기에 앞장서왔다.

80년부터는 마을교회 집사로 일하면서 때마다 마을 경로당을 방문, 잔치를 베풀어주고 80∼90년대 범정부적 행사로 전개하고 있는 국토대청결운동에도 솔선수범하는 등 모범을 보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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