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사색을 즐기는동안 문밖사람은 사색이 돼있다”/“민중·투쟁” 등 사라진 자리에 개인적 고민·가벼운 재치가『그는 「똑똑」했다. 나도 「똑똑」했다. 그는 나의 「똑똑함」때문에 쩔쩔매는 것 같다』
대학가의 화장실은 단순히 일(?)을 보는 장소만은 아니다. 「낙서문화론」이라는 용어가 생겨날 정도로 시대현실과 정신이 가장 적나라하게 반영되는 곳이기도 하다. 이같은 대학가 화장실벽 낙서문화도 변화의 바람을 타고있다. 대학내 학생운동의 쇠퇴와 함께 화장실 낙서의 「주도권」이 운동권 학생에서 일반학생으로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대학가 화장실 낙서판은 양적으로 단연 운동권이나 의식있는 학생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던 것이 사실. 격렬한 대정부비판과 함께 사회체제와 투쟁방향등을 둘러싼 운동권학생들간의 논쟁이 좁은 공간에서 열기를 뿜었다.
학생운동권내 사상투쟁이 한창이던 90년대초, 특히 서울대 사회대 건물 2층화장실은 운동권 정파간의 뜨거운 논쟁의 장이었다. 민족해방(NL)계열의 학생이 한마디를 적고 가면 다음날 어김없이 민중민주(PD)계열의 학생이 비판의 글을 올렸다. 그리고 그다음날은 NL계 학생의 반비판. 갑론을박의 화살표 행진이 며칠동안 이어지곤했다. 「한 생을 살면서 그것을 뜻있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것은 혁명의 길이다」「반제반독점 민중민주주의 혁명 만세」와 같은 강성구호들이 화장실 벽면에 가득했다.
그러나 대학에서 운동권 학생들의 영향력이 감소하기 시작하면서 다양한 내용의 낙서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요즈음 대학가 화장실에서는 사상논쟁이나「노동해방」「투쟁」운운하는 혁명가의 목소리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대신 그자리에 인생의 의미를 찾는 고민의 목소리나 실연의 아픔, 가벼운 감각적 유머가 자리잡고 있다.
연세대 도서관 화장실에서 찾아볼 수 있는「젊은이여 당장 일어나라. 지금 그대가 편안히 앉아있을 때인가―나보고 어쩌란 말이야」 「당신이 이곳에서 한가로이 사색에 잠겨있는 동안 또 한사람은 밖에서 사색이 되어가고 있다」 「당신이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기쁨은 더 컸을 것입니다」 「신은 죽었다―니체, 니체도 죽었다―신, 니들 잡히면 죽인다―청소아줌마」등은 대표적인 유머성 낙서.
어느 누구에게도 털어놓기 힘든 고민과 갈등을 벽면에 토로하는 경우도 많다. 서울대 인문대 화장실 벽 한면을 장식하고 있는「왜 사는가? 나는 지난 2년간 이문제로 고민했고 방황했다. 그리곤 대학에 왔다. 무언가를 기대하며. 그러나 이곳에서 찾지 못한다면 난 죽을지도 모른다」와 같은 낙서는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마저 들게 한다.
「짧은 만남 긴 이별 그리고 허무」「자신의 사랑이 무모한 오기임을 깨달았을때, 그리고 그것이 그 사람을 만난 지 4년뒤의 일일때 그 기분 이해하는가」와 같은 실연과 사랑에 대한 고민도 최근들어 화장실 벽면에 자주 등장하는 주요 「현안」이다.
서울대 사회대 89학번 홍성창씨(27)는 『화장실 낙서에는 80년대 이후 사회와 대학문화의 변화가 촌철살인의 표현으로 반영돼 있다』며 『그러나 최근들어 사회와 현실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담은 내용이 사라져가고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이동훈 기자>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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