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등산에 상당한 취미와 경력을 가지신 분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등산을 할 때에는 늘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두툼한 보온용 옷과 비상시 필요한 식량 등을 짊어지고 가는 것이 상식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힘든 등산을 하고 내려와서는 필요도 없는 옷이랑 비상용 식품들을 산꼭대기까지 지고 올라갔다 내려오느라 힘만 빠졌다고 불평을 한다고 한다.그러나 생각을 조금만 달리해 보면 비상식량이나 두툼한 보온용 옷을 입지 않고도 등산할 수 있었다는 것이 축복이지, 전혀 불평할 것이 못된다는 것이다. 평생 등산을 하면서 한 번도 길을 잃는다든지 조난을 당하지 않고 등산을 즐길 수 있다면 지극히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어찌보면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비상사태에 대비하여 등산할 때마다 비상용 물품들을 지고 다니는 수고를 한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그런 일이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다는 생각에, 괜찮겠지 하는 생각에, 준비없이 등산을 하다가 전혀 예측하지 못한 뜻밖의 사태에 처하게 되면 그 때는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다는 자신의 생명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 지경에까지 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유명한 등반가는 아니라 할지라도 등산을 무척 즐기신다는 이 분의 말씀 속에서 인생의 깊은 지혜를 엿볼 수 있었다.
○한심한 사건의 연속
요즈음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우려할만한 사건들은 이런 깊은 인생의 지혜를 깨닫지 못하는데서 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수백번 민방위훈련을 되풀이 해왔으면서도 막상 북한군 미그기가 휴전선을 넘어왔을 때는 짖지 못하는 벙어리개처럼 잠잠했다. 심지어는 늘 하는 연습이겠거니 하고 컴퓨터 단말기화면에 대기경보가 나타나도 무시했다고 한다. 이 일로 호떡집에 불난 듯 떠들어 대더니 지난 현충일에도 서울 몇몇 곳에서는 여전히 추모사이렌이 먹통이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성수대교 붕괴사고가 난 것이 어제 같은데 서해안고속도로 서해대교의 철근구조물 붕괴사고가 터졌다. 대구가스폭발참사, 아현동가스폭발사고 등이 아직도 우리 뇌리에 남아 있는데 느닷없이 서울 강남 아파트단지등 여덟 군데에서 도시가스가 대량으로 유출되어 많은 사람들을 공포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 넣었다. 정압기의 감압장치가 고장이 나 작동을 안하는데도 점검 일지에는 「정상」이라고 기록을 했다고 하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이런 일련의 한심한 사건들은 최근에 읽은 어리석은 한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상기시켜 준다. 「ㅈ」이라는 아이가 여섯 살이었을 때 일인데, 과속으로 운전하던 아버지가 돈 몇 푼을 자신의 운전면허증과 함께 순경에게 건네주고, 다시 시동을 걸면서 말씀하시기를 『다 그런거야』. 이 아이가 여덟살이 되었을 때의 일로 큰아버지 주재하에 온 가족이 모여 세금을 덜 낼 수 있는 확실한 방법에 대해 토의에 토의를 거듭하면서 하시는 말씀이 『괜찮아, 다들 이렇게 하니까』. 이 아이가 열다섯살이 되었을 때의 일로 이 아이는 자기 학교 축구팀의 오른쪽 수비를 맡고 있었는데 그의 팀 코치가 그에게 상대선수를 방어하면서 동시에 심판이 볼 수 없도록 셔츠를 이용해 상대방선수를 떠미는 방법을 시범으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하는 말씀이 『괜찮아, 다 그렇게 하는 거야』. 이 아이가 열여섯이 되었을 때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슈퍼마켓에서 토마토를 상자에 담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주인이 너무 익은 토마토는 상자 맨 밑쪽에 넣고, 보기 좋은 토마토는 사람들 눈에 잘 띄도록 위쪽에 넣으라고 하면서 하시는 말씀이 『다 그런거야, 괜찮아』. 이 아이가 열아홉이 되었을 때의 일로 상급반 학생이 다가와 시험지 커닝을 하게 해주면 돈을 얼마 주겠다고 제의하면서 하는 말이 『괜찮아, 다들 그렇게 하고 있어』. 이 아이가 결국 불미스러운 일로 경찰에 잡혀갔을 때 집안망신시켰다며 불같이 화를 내시는 그의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 이런 버릇 어디서 배웠니? 집에서는 이런 일 가르친 적이 없는데』.
○뼈저린 깨달음을
등산을 할 때 힘들게 비상식량을 지고 가지 않아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민방위훈련을 십년, 이십년 했지만 늘 내려오는 「대기경보」지시쯤 묵살해 버려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자동경보시스템을 설치해 보니 쓸데없이 아무 때나 울려서 귀찮게만 하니 아예 폐쇄해 버렸다. 그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시설 점검하러 일부러 땀흘리고 갈 것 있나 하며 대충 「정상」이라고 적어 놓아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남들도 다 그렇게 하니 괜찮아』하며 나도 그렇게 살아왔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가!
어제까지는 아무 일도 안일어났지만, 지금 이 순간 느닷없이 태풍처럼 몰려와 자신의 생명을, 가정의 평화를, 사회의 안전을, 국가의 생명을 빼앗아 갈 수도 있음을 우리는 요즈음의 사건들을 통해 뼈저리게 깨닫고 각자 처한 위치에서 늘 성실하게 준비하는 지혜를 배울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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