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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만세」 70돌 학술회의 주제발표 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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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만세」 70돌 학술회의 주제발표 요지

입력
1996.06.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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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만세기념사업회(회장 남상만)와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회장 이현희)는 7일 상오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6·10만세운동 70주년 기념 학술회의」를 열었다. 한국일보사 광복회 국가보훈처 후원으로 열린 학술회의에서 조항래(평택대) 이현희(성신여대)교수와 표영삼 천도교선교사 황묘희 성신여대강사 등 4명이 주제발표를 했다. 주제발표 내용을 요약해 소개한다.<편집자 주> ◎3·1운동이후 일제의 대한식민정책/“일제 문화통치 전환속 실질적 통제 되레 강화”

1919년 3·1운동 이후 국제여론과 거센 독립운동에 직면한 일제는 식민정책을 문화통치로 전환했다. 일제는 식민통치 기구를 개편하고 지방기구를 자치화하는 등 유화적인 정치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주둔군을 증강하고 보통경찰제도라는 이름으로 경찰력을 대폭 강화했다.

식민정책의 강화와 아울러 일제는 3·1운동으로 고조된 반일 민족주의운동에 대처키 위해 민족의식동화의 강요와 민족분열책을 강력히 추진했다. 이를 위해 한국지배에 큰 지장이 없는 범위내에서 언론·출판·집회활동을 허용하면서 교묘한 통제를 가했고 교육면에서도 동화정책을 철저히 실시했다. 또 일제침략 앞잡이, 이른바 친일분자들과 친일단체를 적극적으로 육성·보호해서 이용하는 악랄한 위장술을 활용했다. 친일파들은 민족개량주의를 민족주의라고 강변했지만 이는 오히려 민족독립운동을 부정하는 침략이데올로기로 이용됐다. 일제의 책동이 한민족의 대립과 분열을 더욱 조장하고 민족독립운동을 약화시키던 시기에 3·1운동에 버금가는 6·10만세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은 민족독립운동사에서 더욱 큰 의의를 갖는 것이라 할 수 있다.<조항래 평택대·사학>

◎6·10만세운동이 항일학생운동에 끼친 영향­수원고농 학생운동을 중심으로/“수원고농 학생운동 민족주의 자주노선 견지”

1926년 6월10일 서울에서 일어난 민족계 학생 중심의 6·10만세운동은 1919년 3·1독립운동과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을 연결하는 계기가 됐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될 학생항일운동이 6·10만세운동 직후 경기 수원에서 일어난 수원고농(서울대 농대 전신)학생들의 3차에 걸친 투쟁이다.

수원고농 학생들의 항일운동은 1926년 한국인 기숙사 「동료(동료)」를 중심으로 10여명이 농촌개발만이 조국의 완전한 자주독립의 지름길이라는 신념에서 「건아단」을 조직하면서 시작됐다. 1928년 「조선개척사」로 개칭한 이들은 그해 5월 어린이날 축하회에서 민족의식고취 발언이 문제가 되면서 왕래서신이 압수돼 항일운동 전모가 드러나 1차 탄압을 받게 됐다. 이 사건으로 2명의 학생이 실형을 선고받고 관련자 전원이 1년 가까이 혹독한 고문과 시련을 겪었다. 수원고농 학생들의 항일투쟁은 사회주의의 사상적 침투가 극심하던 당시 상황에서도 민족주의 자주노선을 견지하고 올바른 가치관에 입각해 일어난 것이어서 더욱 높이 평가받을만 하다.<이현희 성신여대·사학>

◎천도교와 6·10만세운동/“천도교단체 「6·10」 준비단계부터 깊숙이 개입”

3·1독립운동을 주도했던 천도교는 1920년 3월 천도교청년회를 발족시켰고 1925년 10월에는 조선농민사를 창립하는 등 꾸준히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했다. 1925년 4월에 이르러 신·구양파로 분열돼 대도주제의 부활과 중의제의 고수로 대립하게 됐지만 민족주의 노선에는 변함이 없었다.

조선공산당 주요 간부인 박래원을 비롯, 구파의 주요 인사들이 6·10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민족주의 노선과 무관치 않음을 증명했다.

박래원은 천도교측의 동원과 지방연락을 담당하고 대형인쇄기를 구입해 격고문 10만장을 인쇄했다. 지방조직에서는 개벽지사 천도교지방교회 등을 중심으로 6월10일 정오를 기해 독립만세를 외치며 선언문을 배포하고 시위행진을 벌이기로 했다.

그러나 거사전인 6월6일 격고문이 일본경찰에 발각돼 서울과 지방의 천도교 인사 80여명이 연행당해 자금과 대중동원에는 실패했다.

천도교청년동맹과 조선공산당원의 지도자였던 박래원이 준비단계부터 천도교청년동맹을 개입시켰던 점과 천도교 주요인사들로부터 교인동원까지 약속받았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이 운동으로 천도교청년동맹은 타협적 민족노선으로 침체돼 가는 항일운동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표영삼 천도교선도사>

◎6·10만세운동의 민족사적 위상/“학생중심 조직적 투쟁 전개 항일운동사 큰 획”

1920년대 민족독립운동의 주요한 특징은 주도층이 학생이라는 것이다. 3·1운동을 전후해 기성 민족주의 지도층에 의해 동원된 학생계층이 1920년대 들어서는 독자적인 민족운동의 계보로 성장한 것이다. 6·10만세운동은 국내외에서 천도교계를 포함한 사회주의계 청년층, 사직동계와 통동계로 일컬어진 민족주의계 학생층, 임정계 민족지사 등에 의해 여러갈래로 준비됐지만 민족주의계 학생들의 조직적이고 과감한 항쟁으로 성공했다.

6·10만세운동에 대해 그동안 다양한 학문적 논쟁이 진행됐지만 분명한 것은 6·10만세운동이 민족독립을 최상의 목표로 삼은 각 계열의 학생층이 협력해서 성공시킨 민족운동이었다는 점이다. 사전에 거사계획이 발각된 사회주의계 학생들을 이 운동의 주도세력으로 평가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당시 이들의 구성을 살펴보면 사회주의계는 물론 비사회주의계 민족진영의 학생들도 상당수 포함돼 있다는 사실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6·10만세운동은 학생들이 중심이 돼 조직적이고 성숙된 투쟁방법을 전개해 이후 항일운동의 구체적 기준이 되었다는 점에서 민족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황묘희 성신여대강사·사학> <정리=이상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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