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래터 총장에게 호통치자 진땀 해명/함께있던 아벨란제도 움찔/오류 부분 찾아내 결국 정정지난 3월 27일.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는 오세아니아 축구연맹 총회가 열렸다. 물론 정몽준 FIFA부회장을 비롯한 한국유치위 관계자들이 현지에 파견돼 유치활동을 벌였다. 가는 곳마다 마주치는 일본 유치위관계자들도 당연히 와 있었다.
정회장은 아벨란제 FIFA회장이나 FIFA 집행위원이 모이는 곳이면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어느 곳이나 달려갔다. 초청을 받을 때도 있었지만 초청이 없다고 해서 그냥 앉아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무작정 찾아가서 회의장 테이블에 앉았다. 이때 내세운 명함은 FIFA부회장이었고 회의 관계자들은 직위에 맞는 대우를 해줄 수밖에 없었다.
일본도 각 대륙연맹에서 회의가 있을 때마다 유치위 관계자를 파견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FIFA임원이 없다. 그래서 막상 회의석상에는 참석할 수가 없었다. 저녁때 환영만찬을 열어 아벨란제회장이나 집행위원들이 참석하기 만을 기다리는 신세였다.
그때마다 정회장은 93년 5월 아시아연맹(AFC) 총회에서 FIFA 부회장에 당선된 것이야말로 월드컵을 유치하라는 하늘의 뜻이라고 여겼다.
아벨란제회장이 오세아니아총회에 참석차 뉴질랜드를 방문한 것은 10년만의 일이었다. 평소 그는 세계축구계에서 그다지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는 이 지역의 축구에는 별반 관심이 없었다. 그런 그가 뉴질랜드 오클랜드까지 날아온 것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회의가 진행되면서 그 이유는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오세아니아의 축구발전을 위해 FIFA집행위원 한 자리를 배정하겠다는 것이었다. 98년 FIFA 회장선거를 의식한 사전 선거운동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아벨란제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2002년 월드컵의 단독개최를 고수하고 있는 자신에게 유럽의 요한손 회장을 중심으로 하는 FIFA개혁파가 공동개최를 주장하면서 압박을 가해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한명이라도 자신의 사람을 심어둬야겠다는 생각으로 오클랜드행 비행기를 탄 것이었다. 막바지에 달한 월드컵 유치경쟁에서 자신이 밀고 있는 일본의 지지세력을 확산시키기 위한 속셈도 있었다.
평소처럼 오클랜드에서 집행위원들을 만나 유치활동을 펼치던 정회장은 총회 직후 회의장을 빠져 나가던 조셉 블래터 FIFA 사무총장을 불러 세웠다. 몇몇 가까운 집행위원들로부터 지난해 9월 FIFA 실사조사단이 한국과 일본을 방문해 작성한 보고서가 무언가 잘못돼가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정회장은 블래터를 벽에다 몰아 세우고 『조사단의 실사가 끝난지 벌써 6개월이나 된다. 왜 집행위원들에게 공개하지 않느냐』고 따졌다. 또 『FIFA가 조사단의 실사보고서를 일본 쪽으로 유리하게 손보고 있다는 말도 들었다』며 해명을 요구했다.
그동안 정회장은 블래터가 개최지 결정투표권은 없지만 FIFA의 살림을 책임지고 있기 때문에 혹시나 행정적인 절차에서 한국에게 불이익이 돌아오는 일이 없도록 그를 우호적으로 대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이날만은 달랐다. FIFA부회장으로서 활동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블래터에게 호통을 쳤다. 그와 함께 회의장을 빠져 나가던 아벨란제회장마저 정회장의 호통에 움찔했다. 블래터총장은 땀을 흘리면서 해명하기 시작했다.
정회장의 유치활동을 보좌하던 측근들은 정회장의 평소 답지 않은 이같은 모습을 목격하면서 그가 이때 이미 한국유치를 어느정도 확신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술회했다.
아벨란제회장에 이어 FIFA내의 제2인자를 공개적으로 공박하는 것은 한국의 유치활동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정회장은 물론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사무총장 정도는 쉽게 대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또한 유치에 자신이 있었기에 이같은 행동을 과감히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블래터총장은 정회장의 호통에 얼마나 혼쭐이 났던지 조사단의 보고서를 곧바로 정회장을 비롯한 집행위원들에게 발송했다.
보고서를 면밀히 읽어 보던 정회장은 중대한 오류를 찾아냈다. 「한국이 선정한 15개 개최지 후보 도시의 경기장은 월드컵 개최가 결정될 경우 공사에 착수한다」는 문구를 발견한 것이다. 정회장은 즉각 블래터총장을 전화로 불러 냈다.
정회장은 지난해 9월 한국이 제출한 월드컵 유치보고서에 「한국은 월드컵 경기장 공사를 한국체육의 중·장기 발전계획의 일환으로 대회 유치 여부와 관계없이 시작한다」고 명시한 점을 블래터총장에게 주지시켰다.
이와 함께 보고서의 정정과 함께 21명의 FIFA집행위원에게 가장 빠른 방법으로 이를 통보해 줄 것을 요구했다. 오클랜드 총회에서 이미 정회장에게 크게 당했던 블래터총장이 이 요구를 즉각 실행에 옮긴 것은 물론이었다.
오클랜드 총회를 마치고 귀국한 정회장은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에서 매우 기분 좋은 소식을 들었다. 애틀랜타 올림픽 아시아최종예선전에서 한국이 일본을 2대1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는 낭보였다. 누적된 피로에 심신이 피곤했던 정회장은 순간 몸안에서 새로운 기운이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3년전 카타르에서의 고배가 생각이 났다. 한국은 93년 11월 카타르에서 열린 미국월드컵 아시아최종 예선전에서 비록 본선진출 티켓을 얻어냈지만 예선 3차전에서 일본에 0대1로 패한 바 있었다. 정회장은 이때의 패배를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정회장은 최근 일본이 FIFA 랭킹에서 한국을 월등히 앞서고 있는 것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터였다. 또한 일본축구의 실력이 한국과 대등할 정도로 향상돼 우리가 월드컵 유치의 한가지 당위론으로 내세운 축구실력의 명분을 퇴색시키고 있던 차였다. 더욱이 한국과 일본 언론들은 결승전의 결과가 월드컵 개최지 선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보도하고 있었다.
월드컵 유치 라이벌 일본을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완벽하게 제압한 것을 보면서 정회장은 월드컵 유치에 대한 결의와 신념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전상돈 기자>전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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