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해도대 방치 유해/봉환계기 의문 제기/당시 일선 두개골 비교연구 「인종론」 등 유행/봉환위 “또다른 반출 가능성” 공동조사 요구일본 홋카이도(북해도)대에 방치돼 있던 동학농민혁명군유해가 봉환됨에 따라 동학혁명기의 한국인유해가 일본에 더 있을지 모른다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지난달 30일 90년만에 유해를 가져온 동학농민혁명군지도자 유해봉환위원회(한승헌 상임대표)는 유골반출여부에 대한 공동조사를 일본측에 요구하고 나섰다.
이번에 봉환된 유해는 지난해 7월 일본 홋카이도대 강당에서 종이상자에 담긴채 발견된 것. 지난 4월 홋카이도대가 발표한 중간보고서에 따르면 1906년 9월 목포 권업모범장 기수였던 사토 마사지로(좌등정차랑)가 가져간 것이다. 신원은 전봉준의 휘하였던 박중진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유골을 가져간 목적과 경위, 홋카이도대의 보관과정이 불분명한 상태이다.
한국측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들어 유골반입사례가 더 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당시 일본에서는 1880년대부터 두개골 비교연구를 통해 민족의 우열을 가리는 「인종론」이 유행했으며 1900년대초 홋카이도대에는 식민정책이론을 뒷받침하는 「식민학」강좌가 개설돼 있었다. 특히 한국의병의 교수형장면을 기록한 그림엽서가 관광선물용으로 판매됐던 점으로 미루어 또 다른 유골반출사례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 지난해 7월 발견당시 유골은 모두 6개였고 그중 3개는 사할린원주민, 1개는 일본 20대 남자, 1개는 불분명하다. 그런데 82년에는 홋카이도대 의학부가 1926년이후 아이누족 유골 1,000여개를 연구용으로 수집·보관해오다 문제가 된 적도 있다.
봉환위원회는 사토가 두개골 연구를 위해 유골을 더 가져갔을 개연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또 기록을 남기는 것이 관례인 일본학계 풍토에서 채집경위와 목적, 반입과정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것은 자료공개를 기피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봉환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온 박맹수 교수(41·영산 원불교대)는 양국의 고고학자 역사학자 해부학자가 공동으로 후속연구를 할 것을 촉구했다.<여동은 기자>여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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