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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FA 부회장선거 “기적의 서막”(정몽준 파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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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FA 부회장선거 “기적의 서막”(정몽준 파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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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06.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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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류 뿌리치고 아 29국 4개월 강행군/초반 기세 일,J리그개막초청… “대표팀 경기로 결판” 뼈있는 농담/“하늘이 준 소명” 폭탄주 마시며 로비93년12월. 대한축구협회. 『회장님 출마하지 마십시오. 망신만 당합니다』 축구관계자들과 마주 앉은 정몽준축구협회회장의 표정이 굳어졌다. 다음해 5월로 예정된 국제축구연맹(FIFA) 아시아부회장 선거에 출마할 계획이던 정회장은 축구인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치자 난감해하는 모습이었다.

축구인들은 정회장의 출마계획을 『무모한 일』이라고 단정했다. 일부인사들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만류했다. 물론 정회장을 아끼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만큼 같은해 1월 축구협회에 발을 들여놓은 정회장에게 아시아축구협회(AFC)는 불모지였다. 또 20여년간 아시아 축구계의 터줏대감노릇을 해온 일본인 무라타 다다오 AFC부회장이 유력한 FIFA부회장 후보로 꼽히고있던 터였다.

하지만 월드컵을 한국으로 가져오기로 마음을 먹은 정회장에게 그같은 만류는 『싸움을 피해가는 일』로 비쳐졌다. 그는 물었다. 『월드컵 유치가 쉽습니까, FIFA부회장에 도전하는게 쉽습니까』 주변인사들의 대답은 정회장이 예상했던대로였다. 『그거야 FIFA부회장이 쉽지요』

『그럼 도전해보는 겁니다』 정회장의 단호한 태도에 축구인들도 더이상 반대하지 못했다. 자신있게 도전의사를 피력하긴 했지만 정회장도 내심 걱정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AFC회원국중 한국을 지지하는 국가는 하나도 없었다. 일본은 경쟁상대이고 인근 중국과 북한의 생각도 알 수 없었다. 나중에 정회장은 이때의 상황을 『동네기반조차 없었다』고 술회했다.

정회장이 FIFA부회장에 집착한 이유는 명백했다. 월드컵 개최지를 결정하는 21명의 집행위원중에 포함될 뿐더러 다른 집행위원들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수시로 마련되기 때문이었다. 물론 일본도 같은 이유때문에 FIFA부회장 선거에 전력투구했다. 96년 5월31일의 쾌거는 이 때 이미 시작됐다.

일본의 무라타 다다오, 아시아올림픽위원회의장인 쿠웨이트의 세이크 아마드, 왕족인 카타르의 함만 압둘라. 모두 만만치 않은 후보들이었다. 정회장은 보좌관들과 전략회의를 가졌다. 동남아 서남아 중동의 지도를 갖다놓고 여행계획서를 짰다.

다음해인 94년 1월4일. 신정연휴를 보낸 정회장은 무작정 비행기 트랩을 밟았다. 정회장은 미수교국인 북한과 시리아를 제외하고 아시아 중동지역 29개국순방에 나섰다. 4개월여동안 강행군을 계속한 정회장의 머리속에는 온통 월드컵밖에 없었다.

마침내 5월13일.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 모든 사람의 예상은 빗나갔다. 정회장 11표, 쿠웨이트 세이크 아마드 10표, 카타르 함만 압둘라 8표, 일본 무라타 다다오 2표. 완벽한 첫 승리였다.

이에 앞서 93년 5월. 김우중회장의 후임으로 3개월전 대한축구협회장에 피선된 정회장은 일본축구협회로부터 프로축구 J리그의 개막식에 참석해 달라는 초청장을 받고 별다른 생각없이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일본은 이미 89년에 주앙 아벨란제 FIFA회장으로부터 2002년 월드컵 유치신청을 하면 적극 밀어주겠다는 언질을 받았다. 이어 유치활동을 본격 뒷받침하기 위해 프로축구를 출범시켰다. 일본의 프로팀은 86년 멕시코월드컵 득점왕인 영국의 개리 리네커와 브라질의 「하얀 펠레」지코 등 세계적인 스타플레이어들을 거액을 들여 영입해 전세계의 눈과 귀를 끌어 모았다.

일본이 개막식 전야제에 정회장을 초청한 것은 장차 경쟁 가능성이 있는 한국축구의 수장을 불러들여 기를 꺾으려는 의도도 포함돼 있었다. 하지만 일본은 정회장을 몰랐기에 결정적인 실수를 한것이다. 정회장은 그들의 의도대로 주눅이 들기는 커녕 오히려 의욕과 야망을 키웠다. 일본의 완벽한 준비에 샘도 나고 화도 치민 정회장은 전야제에서 축하인사를 부탁받자 『2002년 월드컵 개최지를 양국대표팀의 한판승부로 결정 짓자』며 뼈있는 농담을 던졌다. 정회장의 이같은 말을 참석자들은 웃어 넘겼지만 정회장은 일본에 공식으로 선전포고를 한것이고 국제축구계 인사들에게 한국의 유치의사를 전달한 것이었다.

그해 10월 카타르. 한국월드컵대표팀은 미국대회 출전티켓을 따내기 위해 아시아최종예선전에서 혼신의 힘을 다했다. 축구협회장으로서 의욕이 넘쳐있었던 정회장도 대표팀을 따라 대회 개막 1주일전에 카타르에 입성했다. 낮에는 선수들과 함께 공을 차며 선전을 당부했다.

이 대회 최종일 정회장은 월드컵 유치에 대한 의지를 확고하게 다지게 됐다.

예선에서 일본에 0―1로 패해 침울해 있던 한국에 남은 마지막 카드는 한가지였다. 최종일 북한전에서 승리하고 일본이 이라크와 최소한 비겨야 월드컵에 나갈수 있었다. 행운의 여신이 미소를 지었다. 일본은 경기종료전의 10초를 견디지 못하고 이라크에 동점골을 허용, 극적으로 한국의 월드컵행이 결정되고 일본은 문턱에서 주저앉았다.

감격의 눈물까지 흘렸던 정회장은 이때 월드컵유치는 하늘이 자신에게 준 소명이라고 느꼈다. 이때부터 정회장의 일생일대의 싸움은 시작됐다.

당시 정회장은 어렴풋이 FIFA감독관으로 대회를 참관하고 있는 콜로스코프 FIFA부회장이 장차 한국의 월드컵 유치에 도움을 줄것으로 판단하고 그에게 접근했다. 그가 테니스를 즐긴다는 사실을 알아낸 정회장은 매일 호텔 코트에서 웃통을 벗어던진채 그와 테니스를 치며 교분을 쌓았다. 콜로스코프가 한국의 유치활동에 호감을 갖게된데는 그때 맺어진 인연이 크게 작용했다.

94년1월 월드컵유치위원회를 발족시키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 정회장은 20명의 집행위원들과 일일이 인간적으로 접촉했다. 때로는 언쟁도 불사하고 때로는 폭탄주까지 마셔가며 그들의 취향에 맞게 로비활동을 펼쳤다.<취리히=전상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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