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압 강경파 대거 몰락… 이붕만 자리 유지/시위 주도 21명 국내외서 끈질긴 「인권절규」중국 현대사의 비극 천안문사태가 발생한지 4일로 7주년이 된다. 진압을 지시한 최고 실권자 등소평(덩샤오핑)이 날로 기력이 쇠잔해지고 있는 반면 한동안 숨을 죽여왔던 반체제 인사들의 목소리가 서서히 살아나고 있는 가운데 개방 중국의 모순을 극명하게 표출시켰던 「그날」을 다시 맞는 것이다. 해가 갈수록 「과거」가 아닌 「현재 진행형」의 사건이 돼가고 있는 천안문사태의 오늘의 모습을 세차례에 걸쳐 정리해본다.<편집자주>편집자주>
천안문사태 주역들의 오늘의 모습은 세월의 무상함을 일깨워준다.
진압 공신중 7년이 지난 현재 제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은 이붕총리(리펑·68)가 거의 유일하다. 물론 91세의 고령에 따른 건강악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최고실권자로서 「정치적 기능」을 하고 있는 「태상황」 등소평(덩샤오핑)은 예외다. 이붕과 함께 계엄령을 선포했던 양상곤(양상쿤·87) 당시 국가주석은 93년 초 은퇴했고 양상곤의 동생으로 진압군 동원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양바이빙 인민해방군 총정치부 주임은 92년 10월 14차 당대회를 계기로 군권을 사실상 박탈당했다. 12명의 원로중 진압에 가장 강경했던 왕진(왕전) 국가 부주석은 93년 사망했고 진희동(천시퉁·66) 당시 북경시장은 지난해 반부패 드라이브에 걸려 당적만 유지한 채 가택연금됐다. 정치적 사형선고를 받은 처지나 마찬가지다.
강경파가 이런 저런 이유로 몰락했지만 그렇다고 천안문사태직후 대거 축출됐던 개혁파가 권력의 핵심에 복귀한 것은 아니다. 등의 오른팔로 개혁개방의 실천자였으나 실각한 조자양총서기(자오쯔양·77)는 복권설만 끊임없이 나돌고 있을 뿐이다. 천안문사태 당시 당서열 4위의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조자양과 함께 진압에 반대했던 호계립(후치리·67)은 복권돼 93년이후 전자공업부장직을 맡고 있으나 차세대 선두주자로 꼽혀 왔던 왕년의 위세는 회복못했다.
이같은 현상은 강온 양파를 모두 배제한채 중도파를 부상시켜 권력균형을 추구한 등소평의 구상이 7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현 지도부가 등의 노선, 즉 1개중심(경제건설), 양개 기본점(개혁·개방과 프롤레타리아 독재 등 4항원칙)에 확고한 합의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지도부가 경제건설을 국가안정과 불가분의 관계속에서 추진하고 있다는 의미다. 이같은 맥락에서 볼 때 메가톤급 폭발성을 지닌 천안문 재평가 문제를 현 지도부가 거론하기를 기대하기는 극히 힘들다.
지도부의 부침과 마찬가지로 당시 학생 시위 지도부 21명도 명암을 체험하기는 마찬가지다. 5월에 미국땅을 밟은 유강(류강·34)을 비롯한 해외 망명자는 현재 11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북경사범대 심리학과 대학원 출신인 자령(차이링·29)은 미보스턴에서 금융회사에 다니고 있다. 청화(칭화)대 물리학과에 다니던 주봉쇄(조우펑숴·28) 등 수명은 미국에서 학업을 계속하고 있다. 신강(신장)위구르의 소수민족 출신으로 당국의 수배 2호였던 오이개희(우어카이시·27)는 지난해 대만여성과 결혼, 샌프란시스코의 라디오 방송국에서 일하고 있다.
당국에 체포된 왕단(왕단·27) 등 주요 지도자는 석방과 구속을 반복, 양심수로 살고 있으며 그외 수명은 사업가로 변신하는 등 7명이 중국에 머무르고 있다. 단신으로 탱크와 맞선 유명한 사진의 주인공 왕유림(왕유이린)은 공안당국에 곧바로 끌려가 구타사망했다고 알려졌으나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들 학생지도부중 망명자는 해외서 반체제 운동을 하고 있으며 왕단등은 국내에서 끊임없이 천안문 시위에 대한 재평가를 요구하고 있다. 민주화 촉구와 함께 전세계를 상대로 「인권 절규」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북경=송대수 특파원·배연해 기자>북경=송대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