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재고해야 할 대북강경론/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한국논단)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재고해야 할 대북강경론/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한국논단)

입력
1996.05.30 00:00
0 0

얼마전 서울대에서 주최한 강연에서 세계적 석학 하버마스는 독일 통일과정에서 체험한 뼈있는 교훈을 건네 주었다. 「짧은」 통일과정이 남긴 「긴」 그림자를 신중하게 고려하라는 것이 그것이다.북한문제는 우리에게 상처를 입힌 주적의 개념으로, 여기에 덧붙여 지난 30년 동안 지속된 반공정치술로 채색되어 다가오기 때문에 이성적 태도를 견지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신정부의 민주화과정에서 이러한 경향이 조금은 퇴조하는 듯 싶더니 최근 들어 다시 대북강경론이 느닷없이 고개를 들고 있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자유공간이 넓어지면 이념적 다양성도 그만큼 증대한다. 다양성의 증대 속에서 나타나는 친북세력은 걱정할 것이 못된다. 왜냐하면, 사상과 이념의 장에는 서로의 영향력을 견제하고 논리적 모순을 걸러주는 균형적 힘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회주의는 이제 고사하지 않았는가?

그럴진대, 학원가가 다시 친북세력에 경도되고 있다거나 사회에 자생적 사회주의세력이 준동하고 있다는 여론몰이는 반공정치술의 잔재에 지나지 않는다. 지난 시대에 얼마나 많은 청년들이 사상적 낙인찍기에 희생되었는지, 그리하여 할 수 없이 직업혁명가로 나서게 되었는지를 기억한다면, 이런 유의 오류는 이제 더 이상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기성인들이 친북세력으로 몰아붙이는 학생들과 매일 맞대고 있는 사람은 그들의 어떤 얘기에서도 더욱 단단해진 한국사회를 전복시킬 괴력을 찾을 수 없다.

○정보독점의 폐단

북한이 스스로 붕괴하여 평양에 무혈입성하고 개마고원과 금강산을 접수하고 싶어하는 듯이 보이는 대북강경론은 「학원가 친북투쟁보고서」가 더없이 반가울 것이다. 고향과 가족을 등지고 단신 월남한 사람들의 고통을 헤아릴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북한문제를 한갚음식으로 해결하고자 한다면 그대들은 속이 후련하겠지만, 통일한국을 가꾸어갈 그대들의 후속세대는 「긴 그림자」에 더 많은 고통을 짐지게 될는지 모른다.

이제 어렵게 이룬 민주체제의 넓어진 공간에서 북한에 대한 인식과 태도, 그리고 북한정책은 공론화과정을 거쳐야 한다. 왜냐하면 대북강경론이 「국민적 합의」는 아니기 때문이다. 탈냉전시대에 최후로 남아 있는 냉전의 현장에서 강경론자들의 목소리는 온건론자보다 커지게 마련이다. 더욱이 북한문제는 정보개방이 어려워 정확한 판단이 힘들 뿐더러 북한에 대한 언로는 대체로 강경론자가 차지하고 있다. 핵문제가 돌출되던 몇년 전 비장한 전운이 감돌았던 상황을 기억하면 족할 것이다. 북한문제 전문가로 정평이 나 있는 커밍스는 보스턴 동아시아학회에서 북한의 핵보유가 고작 두 개의 탁구공 정도의 규모에 불과하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여태 실상은 미지수이다. 북한에 관한 정보는 국가안보에 직결되기 때문에 완전한 개방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정보독점에 의한 여론몰이는 경계해야 한다. 이철수대위의 기자회견은 북한이 전쟁준비에 광분하고 있음을 전하는 자리였지만, 워싱턴은 의구심을 표명하였다. 신정부에서도 대북한 정책입안자들과 정보기관인력은 거의 바뀌지 않았으므로 정보독점이 그들의 사회적 입지와 영향력 확대에 유용될 소지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그러는 사이 대북정책에 대한 민주적 합의의 가능성이 희생되는 것이다.

○민주적 합의통해

이런 상황에서 자주 방영되는 북한주민의 굶주린 모습을 통하여 여론매체들이 전달하고 싶어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쌀지원이 필요하다는 말인지, 아닌지 분명치 않다. 대홍수의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 정말 그들이 굶주리고 있는지 판단하기 어렵다. 이철수대위가 양말도 못 신었다는 것으로 추위막음도 못하는 정도인지, 북한주민 모두가 기아 때문에 범죄자가 되어가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정보독점과 부분적 과장 탓이다.

인간에게 가장 서러운 것은 배고픔이다. 어른은 그렇다 치고 아이들이 굶주리고 있다면, 강경론과 온건론 분열이, 자존심과 명분세우기가, 「광신적인 사이비 무장종교집단」으로 몰아치기가 무슨 소용이 있으랴. 정책입안자들과 여론지도자들이 이런 부질없는 논쟁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 때, 「북한주민에 일손주기운동」을 시작한 한 시민의 발상과 추진력은 신선하다 못해 박수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주민이 굶주려 쓰러지기까지 얼마나 기다려야 할 것인가」를 반문하는 국제구호기구 관계자의 짧은 코멘트는 인상적이다. 민족개념을 앞세우면 감성적이 될 우려가 있기에 쌀지원문제는 반드시 민주적 공론화과정을 통하여 결정되어야 한다. 대북강경론자들을 의식한 정부의 눈치보기는 민의대변의 역할을 포기 선언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때 당신들은 무엇을 했는가』라는 북한주민의 한맺힌 질문으로 뒤덮일 강경론자들의 통일상은 결국 하버마스가 지적한 「긴 그림자」로 얼룩져 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