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희 참여 동인,여성운동 재조명·시비·선집 등 준비/황현산 교수,문예지 통해 이연주·진이정 기리는 시평한 작가의 문학세계, 더 나아가 삶 전체가 죽음과 함께 송두리째 잊혀지는 것처럼 안타까운 일도 없다. 한창 활동할 나이에 우리 곁을 떠나간 고정희 이연주 진이정씨등 세 시인 역시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을 즈음에 그들을 기리는 작은 움직임이 싹트고 있어 그나마 위안을 준다.
91년 6월9일 지리산 산행도중 실족, 마흔 셋의 나이로 유명을 달리한 고정희씨. 고인이 창립동인으로 참여했던 여성주의단체 「또하나의 문화」가 93년 펴낸 추모문집 「너의 침묵에 메마른 나의 입술」만이 유일하게 그를 기린 유형의 작업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전남 해남 생가에 옮겨 복원된 작업실을 찾는 이의 발길도 갈수록 뜸해지고 있다. 하지만 5주기를 앞두고 그의 문학유산이나 여성운동을 체계적으로 정리해야 한다는 노력이 시도되고 있다. 생전에 여성운동을 함께 했던 조옥라서강대교수는 『「또하나의 문화」가 고정희상 제정, 시비건립, 선집발간등을 준비하고 있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게 약간의 장애가 되지만 모두 시일을 두고 성사될 사업』이라고 말했다.
기일모임도 이번에는 작지만 의미있는 행사와 함께 마련된다. 「또하나의 문화」와 광주지역 여성단체는 「고정희 글쓰기의 자리매김」이라는 좌담회를 6월8일 광주에서 갖는다. 고인은 첫 시집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를 비롯, 「실락원기행」 「지리산의 봄」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 「광주의 눈물비」등 10권의 시집을 남겼다. 그 속에는 사회문제, 특히 여성문제를 날카롭게 인식한 그의 작업의 산물이 담겨 있다.
「두 죽음을 위해」라는 제목으로 「작가세계」 여름호에 실린 황현산고려대교수의 시평은 죽음과 시인의 관계를 통해 이연주 진이정씨등을 추모한다. 첫 시집 「매음녀가 있는 밤의 시장」과 유고시집 「속죄양, 유다」등을 두고 간 이연주씨(1952∼92)와 유고시집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를 남긴 진이정씨(1959∼93). 이씨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진씨는 폐병과 영양실조로 숨졌지만 자살의 흔적을 짙게 남겼다. 두 사람은 황교수가 만나기로 약속했거나 시집의 해설을 쓰기로 한 중에 세상을 떠났다. 이씨의 시를 그는 『너무 처참하고, 어렵게만 이끌고 갈 시인의 삶이 역력히 드러나 있다』고 쓰고, 진씨의 시에 대해서는 『삶의 고통과 해탈이 강제적으로 역전되는 경험이 담겼다』고 이야기했다.
황교수는 『혹자는 우리에게 시의 시대가 갔다고 말한다. 그러나 시의 시대가 있었다는 것도 빈 말이며, 시의 시대가 갔다는 것도 빈 말이다. 시집이 100만부가 팔렸다는 사실이나, 초판도 팔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나, 그런 사실이 증명해 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시인들은 어느 시절에도 그 독창적 작업의 외로운 극한에, 죽음이 섞인 고독 속에 있었고, 앞으로도 내내 그럴 것이다』라고 말했다.<김범수 기자>김범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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