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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의 큰책임·큰정치/이성춘 논설위원(일요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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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의 큰책임·큰정치/이성춘 논설위원(일요시론)

입력
1996.05.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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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정신」이란 철학자들이 썼던 말로서 헤겔은 인간의 보편적 정신세계가 역사속에서 전개되는 과정을 강조한 것으로 유명하다. 일반적으로 시대정신이란 시대적 사조와 분위기, 즉 국민의 뜻과 희망과 요구를 의미한다.시대정신은 선거때 국민의 투표를 통해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번 4·11총선거에서 나타난 시대정신은 낡은 정치를 과감히 청산, 세대교체의 실현과 함께 참신하고 건설적 생산적인 정치를 해달라는 것으로서 이는 곧 국민의 준엄한 명령인 것이다.

미국대통령은 중간선거(상·하원 의원선거)에서 여소야대가 돼도 걱정이 없다. 예산안과 법안 결의안등을 처리하는데 시간이 더 걸리고 조금 불편할뿐이다. 설사 야당이 정부의 뜻과 어긋나는 의안을 통과시켜도 저지할 수 있는 중요한 무기를 갖고 있다. 하나는 거부권(Veto)행사다. 반려된 의안이 성립되려면 상·하원에서 재적의원 3분의2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하며 통과될 가능성이 있을 경우 또하나의 무기는 국민에게 호소하는 것이다.

2차대전 이후 주로 민주당이 의회를 장악, 아이젠하워·닉슨·포드·레이건·부시 등 공화당 출신 대통령은 거부권을 수시로 발동했고 지난 선거때 40여년만에 공화당이 의회의 다수당이 되자 클린턴은 1년전 공화당의 164억달러의 예산삭감법안에 대해 처음으로 비토한 바 있다.

미국에서 여소야대가 됐다고 해서 의원을 포섭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가 없다. 그런데 같은 대통령중심제인 우리나라의 경우 집권자는 여소야대가 되면 무슨 큰일이나 나는 것처럼 위기감을 느끼며 과반수 의석을 확보해야 직성이 풀린다. 역대 선거중 여소야대가 된 때는 딱 두차례 있었다. 처음인 2대국회때는 야세가 강해 이승만대통령은 결국 정치파동을 일으켜 공포분위기 속에서 발췌 개헌안을 통과시켰고 두번째인 13대 때는 여소야대의 4당 체제로 민주정치를 실험할 수 있는 호기를 맞았으나 노태우정권은 5공청산 등으로 시달리다가 3당 합당을 하고 말았다.

여야는 총선후 15대국회가 열리기도 전에 「시대정신―민의」를 어기고 대결정국을 조성하여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신한국당이 무소속과 민주당의 당선자 11명을 영입하여 과반수인 150석을 만든 것은 결코 합당한 일이 아니다. 과반수가 돼야 국회의장단과 상임위원장의 선출과 장차 의안을 안정적으로 처리할 수 있고 또 무엇보다 양당과 김대중·김종필총재를 제압할 수 있다는 계산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비록 과반수는 미달됐으나 서울에서 사상 처음으로 압승한 여세를 살려, 또 정도로도 정치를 이끌 수가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대여당다운 자세라고는 보기 어렵다.

두김씨도 그렇다. 여당의 안위적인 의원빼내기에 화가 난 것은 이해하지만 선거패배에 대한 반성은 하지 않고 새 국회의 원구성거부선언에 이어 대규모집회로 장외투쟁을 벌이는 것은 구태정치의 재연이 아닐 수 없다. 두김씨의 강경투쟁이 입지에 대한 위기의식과 당내로부터의 인책과 퇴진공세를 돌리려는 자구책이 아닌가 하는 시각도 적지않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어쨌든 교착된 정국으로 새국회를 맞을 수는 없다. 이렇게 된데는 여야 모두에 책임이 있지만 우선적으로 풀어야 할 책임은 여당에 있다. 여당은 새롭고 큰 정치의 자세를 보여야 한다. 첫째 더이상 인위적인 영입을 중지한다는 뜻을 공언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국민과 야당에 신뢰를 회복할 필요가 있다. 물론 장차 자연적으로 이념에 동조하여 입당하는 것은 막을 수가 없다.

다음 역대여당이 하지 못한 당내민주화를 과감하게 실행하는 안이다. 수평적·수직적인 언로의 개방으로, 밑으로부터 국민과 당원의 뜻에 의해 움직이는 활기찬 여당으로 탈바꿈해야함은 필수적이다. 셋째 총재인 김영삼대통령이 제시한 이른바 21세기를 겨냥한 미래정치, 생산적 정치의 구체안을 국민에 제시하고 이를 실천해야 한다. 넷째 밀실정치, 일부계파에 의한 정치를 벗어나 공개정치, 투명한 정치, 공정한 정치를 선보이는 일이다. 끝으로 신인들에게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는 일 역시 매우 중요하다.

이제 여당이 힘으로 정치를 독선독주하고 무조건 야당을 눌러 이기는 정치만을 지향하는 것은 그야말로 낡은 정치의 표본이다. 여당은 현재의 조그만 실리에 집착하기 보다 미래의 국익과 민복의 증진을 내다보는 큰 정치의 모범을 보일 의무가 있다.

오늘의 국민은 여의 독주를 묵인하고 야의 바람에 움직이지 않는다. 국민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시대정신의 존중과 실천뿐이다. 따라서 여당은 낡은 정치에 대한 과감한 자기 파괴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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