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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에 대하여(박경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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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에 대하여(박경리 칼럼)

입력
1996.05.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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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민족 혈맥속에 「창조의 능력」 으로 부활 믿어/잘 꾸며진 옷·몸매 등 축소된 세계아닌/자연·자유가 함께 하는 무한공간의 균형/삶의 공간 갈수록 좁아져 생명억압·파괴 속출얼마 전 서울에서 이 일 저 일이 겹쳐 북새통을 겪느라 기진맥진해 있을 때 마치 길목을 지키고나 있었던 것처럼 김형국교수에게 덜미를 잡혀(?) 쟁쟁하고 고명한 학자들 모임인 미래학회에 초청되어 나간 일이 있었다. 두서없는 내 말버릇 때문에 되도록이면 그런 모임에서 얘기하는 것을 피해온 터에, 김교수에게는 여러가지 빚이 많았고, 우물쭈물하다가 나가게 되었는데 뜻밖에도 멋에 대한 것이 그 날의 주제였다. 먼저 김태길교수께서 멋에 대하여 중요한 부분을 소상히 짚어 나가시는 동안 준비없이, 영문도 모르고 나온 처지여서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당황할 밖에 없었다. 얼떨결에 삼국유사의 정신을 들어 얘기를 하기는 했으나 즉흥적이며 피상적이라는 자책감을 면하기 어려웠다.

○언어엔 삶의 모습이

흔히 쓰는 우리 민족 고유의 언어 중에는 흔하게 쓰이는데도 그 개념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은 경우가 더러 있다. 달무리가 진 듯 희미하여 어디서부터 뜻으로 진입해야 할지, 언어가 지닌 본래의 불확실성이 보다 심화하고 확대되기라도 한 듯, 아니 그보다 그런 언어는 복합적 내용을 껴안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멋이라는 말이 바로 그러한데, 요즘 그러한 유의 말들이 내용면에서 퇴화하고 단순해졌다고나 할까. 부분만 따서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고 숫제 본뜻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통용되기도 한다. 하찮은 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상의 빈곤을 초래한 그간의 사정을 엿볼 수 있는 일이다.

언어란 본시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며 시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 만큼 변천 따라 어의가 변할 수도 있는 일,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도 그렇고 진지함을 모멸하는 오늘과 같은 세태에서는 무관심이 상수라. 그러나 여전히 조바심은 남는다. 무슨 까닭일까. 아마도 그것은 그러한 언어 속에 치열한 소망과 절도있게 다스려나가는 우리들 삶의 모습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진지함을 비웃는 사람에게는 우리가 이 세상에 소풍나온 것쯤으로 생각될지 모르지만 분명 사람들, 모든 생명은 이 세상에 소풍나온 것도 놀러나온 것도 아니며 오락으로 시간을 잡아 먹으라고 내보내진 존재도 아니다. 새들은 노래하고 나비는 춤을 춘다고들 하지만 소위 진지할 필요가 없는 다른 생명에 대한 조작의 시각이다. 기실 새들은 노래도 하겠지만 슬피 울기도 하고 고통에 비명을 지르기도 할 것이다. 나비 역시 마냥 춤을 추는 것은 아니다. 살기 위하여 꿀을 찾아 이 꽃 저 꽃을 헤매는 삶의 행위 그 자체인 것이다. 말 하나 가지고 거창하게 나온다 할지 모르지만 그 속에 삶의 당위성, 생각의 파편들, 그것들의 통합을 함축하고 있다면 마땅히 거창할 수도 있다. 해서 그런 씨알들이 변질되었거나 아주 사라져버린데 대하여, 또 부활이 절실하다면 우리는 그간의 경로를 더듬어 보는 것도 무의미한 일은 아닐 것 같다.

일제 강점시대를 거쳐서 해방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서구의 사상을 본으로 하고 그 체계를 중심으로 위성같이 맴돌아야 했던 상황에서 우리 것을 부정하고 폐기하고 혹은 말살하는 일부터 착수했던 소위 계몽파를 필두로 이 땅의 대부분 지식인들이 서구의 이론이나 사상을 금과옥조로 삼아 복창해온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새삼스런 일도 아니지만 이따금 학생들을 대하고 있으면 서구지향의 지식인들 복사판을 보는 듯 놀라는 일이 있다.

지식이란 본래 암송의 속성을 지니고 있지만 새로운 것을 위한 토대, 창조의 밑걸음이 되지 못한다면 무용지물이다. 복창이나 복사판으로 이루어 놓은 것이 도시 무엇일까. 황량하기만 하다. 물론 복제품이 홍수같이 쏟아져 그런 면에서 풍요해진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한 문제는 위험하고도 심각하다. 그렇기 때문에 부랴부랴 창조력을 운운하게 되었으며 교육제도가 급선회하는 조짐이 보이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 할 수 있겠다.

○서구문명 체제 한계

서구의 거대한 체계가 흔들리고 있는 것을 느낀 외국의 석학들 중에도 우리에게 고마운 충고를 하는 사람이 있다. 서구와 일본을 본보지 말라. 한국은 독자적인 길을 찾아야 한다고. 그럼에도 잠에 취하여 눈이 떨어지지 않거나 기득권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금광이라도 찾듯 그 쪽의 색다른 이론을 입수하여 득의에 차서 웃음 흘리는 일부 지식인들 모습은 여전한 듯 하다.

그야 얻은 것은 적지 않았고 다리를 놓아준 지식인들의 공도 부정 못한다. 그러나 영구불변의 방식이란 없는 것이다. 서구문명의 체제에 한계가 온 것은 분명하고 물질 역시 유한한 것이다. 먹고 입고 꾸미고 즐기는 풍요, 노인들은 좋은 세상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젊은이들은 좋은 세상이라 하지 않는다. 욕망이란 상대적인 것이며 풍요하다는 것은 욕망의 풍요를 동반하게 돼 있다. 욕망이 세계에 충만하다는 것은 또한 멸망을 부르는 것이기도 하다. 욕망이 들끓는 만큼 지구는, 자연은 쇠잔해질 밖에 없다.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 불교의 천지개벽사상에는 불로써 생물을 멸망케 하는 것이 네 차례, 다음 다섯번째는 물로써 세상을 멸망하게 한다는 주기를 말하고 있다.

반드시 그것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불얘기는 어쩔 수 없이 핵무기를 연상하게 하고 물은 남극 북극의 빙산들이 녹아내려 지구를 덮어버리는 노아의 홍수를 생각하게 한다. 오늘 우리 인류는 언제 녹아버릴지 혹은 부딪쳐서 깨어질지 모르는 빙산을 타고 떠내려가면서 먹고 마시고 즐기며 쓰잘 데 없는 담론으로 삶의 표피만 어루만지고 있는지 모른다. 내일 지구가 끝나는 한이 있어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소위 그 엄숙주의가 역겨울지 모르지만 내일 지구가 깨어져도 오늘은 먹고 마시고 즐기겠다는 것은 체념인지 비장미인지 죽음을 초월한 것인지 아니면 장난인지.

우리 민족에게 멋은 창조의 원형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때문에 멋은 문명이 자아낸 것이 아니며 문화의 소산이다. 자연과 자유가 함께 노니는 무한공간에서 불확실한 과거 현재 미래라는 한 줄기, 무심하고도 잔혹한 시간의 선상에서 인간이 사유하고 추구하는, 불교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토의 장엄을 관찰하는데서 생겨나는 균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옷 잘 입는 사람, 세련돼 보이는 사람, 행동거지 몸매가 유연해 보이고, 잘 꾸며진, 그러니까 인공적 공간의 구조물, 예를 들자면 많겠으나, 물론 그런 것도 멋이라 표현할 수는 있다.

○합리주의 틀에 갇혀

그러나 시각적인 데 편중된 유물적 관점에다 멋의 개념을 두는 것이 오늘의 경향인데 어떤 뜻으로든 그것은 축소현상이며 합리주의 혹은 자본주의가 설정한 틀에 가두어진 상태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축소지향 가두어진 상태, 반대로 확대와 개방을 한 번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우리가 느끼고 있는 그 시작의 구름바다, 안개를 헤치고, 자연은 젊었고 상처받지 않았으며 생명들은 윤기가 흐르고 싱그럽던 그 곳 그 시간 속으로 들어가서, 지금은 초라하게 축소된 무속만으로 그 흔적을 남기고 있으며, 우리 민족의 주권이 상실되었을 때 일본과 계몽파와 기독교문화 3박자가 잘 맞아서 미신으로 단죄되었던 샤머니즘, 유일신, 카리스마적 존재도 없었고 모든 생명의 영성을 믿었으며 교신을 소망하고 추구하여 생명의 평등 공경을 실천했던 샤머니즘, 죽은 자와 이승에 남은 자 사이의 교신을 열렬히 희구했던 것은 무한공간의 확대를 의미하고 무한대의 시간에 대한 인식이 아니었던가.

다음 불교가 시대를 열면서 체계화해 가는데 여기서 공간의 축소를 희미하게나마 감지하게 된다. 그리고 고도의 정신세계, 멋으로 집약되는 삼국유사는 샤머니즘의 꼬리를 물고 불교적 체계 속에서 나타난 것이다. 다음은 인간의 도리, 인간의 규범인 유교시대로 들어오는데 공간은 한층 더 축소되고 사회주의 자본주의 통틀어 유물이라는 체계가 지배하는 현재는 숨통이 막히게 공간은 축소되고 말았다. 더 이상 줄일 수 없을 만큼. 자유와 풍요를 향유하고 있다 하지만 현대인은 모두 정체모를 억압에 시달리며 내부에서 외부에서 구속하고 구속감을 느낀다.

자연도 병들었지만 생명들은 무진장 학살당하며 사람들도 병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사회가 살벌하고 문화는 부재 퇴폐풍의 만연, 이런 속에서 멋이 변질되는 것은 당연하고 창조적 능력이 고갈되는 것 또한 당연하다. 공간의 확대 속에 창조의 원동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 곳에는 자유와 자연이 자연스럽고 건강하게 존재한다. 매번 하는 얘기지만 우리는 지나간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러나 이제 한계에 달했으면 축소된 공간을 넓혀나가야, 새로운 방향으로 넓혀나가야 하는 게 아닐까.

멋에 해당 일어 없어

끝으로 또 일본 얘기를 하고 넘어가야겠는데, 미래학회에서 멋에 대비하여 이키(수, 의기)라는 말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키에는 에로티시즘과 그로테스크가 포함되어 있다. 그런 것에서 나타나는 미감을 말한다. 그래서 대개는 유곽의 여인들의 농염한 모습, 행동거지 또는 그것에 준한 남성을 두고 표현한 말이다. 달리 일본에는 멋에 해당하는 것이 없다. 일본의 특색이 축소지향이라는 것은 다 아는 일이거니와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축소되는 공간은 사람을 병적으로 만든다. 자유와 자연스러움이 없기 때문이다.

그로테스크와 에로티시즘에 흐르는 것은 하나의 정석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김령주가 쓴 고려불화의 글 속에 「도철에 나타나는 징그럽고 사나운, 꺼림칙한 다이내미즘을 지닌 아름다움은 지배자가 그것을 원하기 이전에 당시 끔찍한 지옥같은 공방의 반인간적인 작업에 몰아넣어졌던 노예장인들의 저주와 원한이 서린, 이같은 정신이 은대 청동기에 투사되어 나왔던 것이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것이 비록 어떤 유의 아름다움일지라도 멋하고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부정적인 것을 노출한 것이며 보편적인 것일 수는 없다.

○사회병리현상 원인

오늘 우리나라에서 판치고 있는 소위 일본문화는, 문화라는 말에는 상당한 어폐가 있지만, 아무튼 폭력과 섹스와 잔혹 괴기함 비정상이 기조를 이루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을 선호하는 이유는 사회적 병리현상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축소되는 공간, 자정할 능력을 잃어버린 자연, 물은 썩고 땅은 죽어가고 자연의 일부인 사람도 다른 생명들도 멸종되고 병드는 것은 정한 이치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공간에 대한 의식을 나는 믿고 싶다. 아직 우리 혈맥 속에서는 창조에의 정열이 맥박치고 있다는 것을. 분명 국민소득 1만달러를 넘어서게 된 데에는 수천년을 흘러온 창조적 능력이 반부담은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멋이 부활할 것도 믿고 싶다.

믿음의 근거로 예를 하나 들자면 일본에서는 말 잘하는 것을 세워놓은 판자에 물이 흐르듯 거침이 없다는 뜻인데 우리는 그것을 청산류수라 한다. 우리 민족의 멋이 나타난 비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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