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파 차돌을 계란착각 깨물었죠”/사생활 문란한 여배우에 속아 결혼 벽지 좌천/영양실조로 죽은 아기보고 “회의” 압록강 넘어/중 경찰 피해 전전하다 한국 여선교사와 재혼/“「목숨 건 탈출,가깝고도 먼 한국」 책쓰고 싶어”/22개월 중국·러시아 전전 피마르는 방랑생활 정씨/본보 김건수·윤순환기자 블라디보스토크서 만나94년 6월 북한을 탈출, 1년 10개월동안 중국과 러시아 지역을 떠돌던 정재광씨(35·본명 정철)를 지난달 5일 블라디보스토크의 모처에서 어렵게 만나 인터뷰했다.
정씨는 당시 천신만고끝에 모스크바 소재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로부터 난민지위판정서를 받은 상태였으나 북한측의 위해를 우려해 처음에는 인터뷰를 완강히 거절했다. 그러나 그는 인터뷰가 시작되자 북한 내부사정과 자신의 탈북과정에 관해 2시간여에 걸쳐 소상히 털어놓았다. 그는 이 인터뷰가 있은 지 25일후인 4월 30일 귀순, 서울에 도착했다.
김일성 종합대학교 졸업→평양 사회안전부 병원 치과의사→음모에 휘말려 양강도로 추방→중국으로 탈출→러시아로 재탈출→귀순. 「탈북자」 정재광씨의 기막힌 인생역정이다. 북한의 처참한 실상을 체험하고 모진 고생뒤에야 한국으로 올 수 있었던 정씨는 기자에게 책을 쓰고 싶다고 했다. 그는 제목까지 말했다. 「목숨건 탈출, 가깝고도 먼 한국」.
87년 김일성 종합대학교 자동화 학부를 졸업한 정씨는 아버지가 「남조선」출신이라는 이유로 배치를 받는데 애를 먹었지만 재교육 대학에서 「구강과 의사」자격을 취득, 91년말부터 평양 사회안전부(경찰) 병원에서 일할 수 있었다. 평양시 모란봉 구역의 인흥 인민학교와 인흥 중학교를 거쳐 김일성 종합대까지 나온 정씨는 수재였고 북한 사회의 엘리트였다.
93년초 평양 예술영화 촬영소의 아리따운 여배우(정씨는 이 여배우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를 소개받았을 때 「알짜 빨갱이」에다 전도유망한 정씨가 이를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음모는 그때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당간부 등의 요구로 술자리 시중을 들곤했던 그 여배우는 진달래 합영회사 사장과 치정관계를 맺고 있었고 이같은 사실이 촬영소에서 문제가 돼 결국 배우자격을 잃게 됐다. 「혁명화 대상」으로 낙인찍혀 고향인 양강도로 추방당할 위기에 처한 이 여배우는 추방을 면하기 위해 평양에 살고 있는 남자와 결혼하려고 했다. 이 덫에 정씨가 걸려든 것이다. 고위간부를 많이 알고 있던 이 여배우는 정씨 몰래 결혼등록을 해버렸다.
93년초 사회안전부 정치부장(당비서)은 정씨를 불러놓고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와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의 정치적 신임과 배려에 의해서 동무를 양강도로 파견하기로 했다』고 파견장을 읽어내려갔다. 여배우는 물론 「남편」인 정씨에게도 양강도 추방령이 떨어진 것이었다. 날벼락이었다.
그뒤 정씨가 양강도 혜산에서 1년여 동안 보고 겪은 것은 처참함이었고 누를 수 없었던 것은 김일성 부자에 대한 분노였다. 정씨가 93년초 혜산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6개월째 쌀배급이 끊겨 있었다. 철제품 생산공장에서 석탄을 수령하는 인수원으로 배치된 정씨는 공장이 가동되지 않기 때문에 월급이나 쌀표도 받을 수 없었다. 평양에서 가지고 간 돈이 다 떨어질 무렵 정씨는 통강냉이(옥수수) 알을 세어서 먹어야 했다.
동원에 나와야 할 사람이 배고픔에 지쳐 집에 드러누워 있고 강냉이와 바꾸기 위해 아름드리 통나무를 자르고 공장 기계를 떼어내 중국으로 실어나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영양실조에 걸려 태어난 지 며칠뒤에 죽은 아기를 보았을 때 정씨는 「근로인민 대중의 나라」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렸다.
94년 6월 21일 하오 7시께. 비가 쏟아지고 있었고 혜산과 중국의 장백(창바이)을 잇는 다리 밑으로 폭 20의 압록강이 거세게 흐르고 있었다. 교대시간을 노리고 있던 정씨는 경비병들이 초소쪽으로 돌아서자 강변의 모래언덕 구덩이에서 나와 강으로 내달렸다. 하지만 강을 중간쯤 건넜을 때 물살에 몸이 휩쓸렸다. 천우신조라고나 할까 손에 묶은 장대가 돌틈에 끼였고 정씨는 강을 건널 수 있었다. 압록강을 건넌 뒤 북한쪽을 돌아보니 장대비속에서 교대한 경비병들이 초소밖으로 걸어나오고 있었다.
정씨는 한국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통화(퉁화)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4일째되니 눈앞에 있는 찻돌(차돌)이 계란으로 보여 입에다 넣어봤다. 깨물어보니 돌멩이였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죽기로 작정하고 산에 올라갔으나 묘지를 보자 불현듯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났다. 정씨는 다시 내려왔다.
그뒤 정씨는 조선족 마을을 만나 한 할머니의 도움으로 밥도 먹고 옷도 갈아입을 수 있었다. 심양(선양)에 가면 한국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해 철길을 따라 계속 걸었다. 증명서가 없었기 때문에 기차를 탈 수 없었다. 그런데 한 역에서 중국 사람이 열차 승강구 손잡이를 잡고 있는 게 보여 옆에 같이 매달렸다. 통화에서 두 정거장 못미친 곳이었다.
하지만 통화역에 도착하기 얼마전 고개를 들어 통로쪽을 보았을 때 정씨의 눈과 마주친 것은 중국 공안(경찰)이었다. 기차안에서 모진 구타를 당했다.
『이제는 끝이구나』
통화역전 파출소로 끌려와 벽에 붙은 족쇄에 발이 묶였을 때 정씨는 완전히 자포자기 상태였다. 그런데 하늘은 정씨를 버리지 않았다. 옆에 있던 책상밑에 가구등의 가장자리에 대는 「쫄대」가 2개 있었고 정씨는 다행히 압수당하지 않은 손수건으로 쫄대를 연결, 벽에 달려있던 열쇠를 튕겨내 잡을 수 있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기적이었다. 점심시간이라 1명만 남아있던 파출소 앞쪽 책상밑으로 살금살금 기어나왔다.
우여곡절끝에 심양에 도착했다. 교회도 찾아가 보고 조선족의 도움도 청했으나 한국으로 가기 힘들다며 시골에 숨어살 것을 권했다.
『여기서 주저 앉을 수는 없다. 북경(베이징)으로 가자. 거기에 한국 대사관이 있을 것이다』
차를 얻어타고 걷기를 반복하며 북경에 도착한 것은 탈출한 지 12일째인 7월 2일이었다. 하지만 한국 대사관이 정씨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중국 정부가 탈북자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한국 대사관은 탈북자의 망명을 받아줄 수가 없었다.
홧김에 술을 마시려고 조선족 식당에 들어갔는데 한국 여자 선교사가 손님 한사람을 붙잡고 전도하는 게 보였다. 수령으로부터 버림받고, 한국 대사관으로부터도 도움을 얻지 못한 정씨는 무엇인가에 이끌려 그녀에게 도움을 청했다. 지금은 부인이 된 유씨(38)를 만나는 순간이었다. 「한국 여자와 탈북자」는 지난해 12월 5일 연길(옌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지난해 12월말 러시아로 재탈출한 정씨는 모스크바의 유엔 난민고등 판무관실(UNHCR)에 일주일에 3∼4번씩 2장짜리 팩스를 보냈다. 난민지위를 부여해 달라는 탄원서였다. 마침내 3개월뒤 UNHCR에서 난민지위 판정서가 날아왔다.
「한국으로 가는 티켓」을 얻은 것이다. 1년10개월간의 탈북이 막을 내렸다.
정씨는 지난달 30일 서울에 도착, 지금 「대한민국」의 공기를 마시고 있다.<블라디보스토크=윤순환 기자>블라디보스토크=윤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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