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추적·현지 경찰에 쫓겨/숨을곳 없이 끝없는 도피/북 보복 두려워 교민들도 도움 외면/북 체포조·러 경찰 끈질긴 추적·감시/주변 공장선 채용 기피 먹고살기 막막북한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러시아땅 연해주는 폐쇄된 나라 북한을 엿볼수 있는 조그만 창이다. 탈북자의 땅 이기도 한 이 곳에서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탈북자들의 목숨을 건 도피생활, 마약밀수 등 천태만상의 외화벌이, 믿어지지 않는 벌목공들의 삶과 죽음, 「도심의 벌목공」이 될 지 모를 운명의 건설 노동자들. 본보 취재팀은 4월초 연해주에서 탈북자 실상과 변화하고 있는 벌목공의 세계를 취재했다.<관련기사 15면 편집자주>관련기사>
【블라디보스토크=윤순환 기자】 북한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 은신하고 있는 탈북자들은 최근 북한과 협조관계에 있는 러시아 경찰의 단속강화와 교포 및 선교사들의 어쩔 수 없는 외면 등으로 전례없는 고립무원의 지경에 처해 있다.
연해주에서 만난 탈북자들과 이곳 교포 등에 따르면 4월 현재 연해주 등 러시아 지역을 떠돌고 있는 탈북자는 2백∼3백명이며 대부분이 6개월 이상 온갖 고생을 하며 기약없는 도피생활을 하고 있다.
모스크바 주재 유엔 난민고등판무관실(UNHCR)의 난민판정을 받은 김일성 종합대학교 출신 치과의사 정재광씨(35·본명 정철)는 1년 10개월의 도피생활중 현지경찰에 서너차례나 붙잡히는 등 위기를 맞았지만 헌신적인 협조자의 도움으로 뜻을 이룬 몇 안되는 경우에 속한다.
연해주 오비르(출입국 관리소)의 비자담당 책임자 빅토르 프로트니코프씨(48)는 『지난해 러시아 경찰이 체포, 나홋카의 북한 총영사관에 넘긴 탈북자만도 10명이 넘는다』고 말했다.
지난해 3월 미국 국적의 한국인 선교사 이주헌씨(당시 60세) 부부가 하바로프스크에서 북한 공작원으로 추정되는 북한인에게 피살된 뒤 선교사와 교포들은 탈북자에게 도움을 주는 것을 극도로 꺼리고 있다. 이곳에서 5년째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 남모 목사(42)는 『이선교사 부부 피살사건이후 탈북자를 돕기 위해 목숨까지 걸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이 이곳의 인심』이라고 말했다.
탈북자들이 우선 두려워 하는 것은 러시아 경찰이다.
지난해 11월 탈북 벌목공 신명철씨(34)는 은신하고 있던 블라디보스토크의 한 아파트에서 러시아 경찰의 급습을 받고 2층에서 뛰어내리다 양쪽 발목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병원으로 옮겨진 신씨는 그뒤 교포의 도움으로 러시아 경찰의 감시망을 뚫고 가까스로 탈출할 수 있었다.
북한 체포조 역시 러시아 경찰못지 않게 두려운 존재이다.
하바로프스크에서 7년째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 유모 목사(53)는 4월초 『러시아 경찰로부터 2∼3일전 평양에서 탈북자 체포를 위한 단속반이 파견됐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하바로프스크의 북한 임업대표부 벽돌공이었던 김장운씨(45)가 겪은 북한 체포조의 추적은 전형적인 예다. 92년 김씨가 탈출한 며칠 뒤 북한 체포조는 지금은 그의 부인이 된 러시아인 마르가리타(42)의 집에 들이닥쳤고 그후 6개월여동안 그녀의 8층 아파트앞에서 감시를 했다. 그녀가 블라디보스토크로 출장갈 때 체포조 1명이 따라붙은 것은 물론 그의 언니 타치아나(45)의 기숙사도 체포조의 감시를 받았다. 김씨는 93년말 겨우 러시아 「비공민권」(러시아 국적자는 아니지만 러시아 거주권을 부여받은 일종의 영주권)을 얻었다.
지난해 12월말 하바로프스크 역에서 탈출에 성공한 정필무씨(가명·39)는 탈출 3개월여만에 도와줄 손길을 찾지 못한 채 중국으로 또 다른 유랑의 길을 떠나야 했다.
90년 체크도민 벌목장에 온 정씨는 수완이 좋아서 3년 기한의 벌목장 근무를 연장, 6년간 일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으나 이 기간마저 거의 만료되자 탈북을 감행했다. 1천달러 가까이 주고 만든 위조 여권을 이용, 하바로프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내려올 때만 해도 그에게 한국 선교사와 현지 공관은 희망의 등불이었다. 하지만 그가 필사적인 도움을 요청한 선교사들중 하루 이상을 돌봐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현지공관에도 손을 내밀었으나 도와주기 어렵다는 말만 들어야 했다. 한때 1백명에 달하는 탈북자들이 도움을 요청했던 우리 공관을 찾은 탈북자는 올들어 한두명에 불과하다.
탈북자들은 숨을 곳도, 도와주는 데도 없이 「절망의 미아」로 동토의 러시아를 떠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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