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단의 중진 이동표화백은 한평생 어머니를 소재로 한 그림만 고집스럽게 그리고 있다. 1933년 황해도 해주에서 자신을 낳은 뒤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만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인 것이다.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를 향한 절절한 그리움이 작품마다 배어 있다.94년 5월에는 어머니의 넋이 고향하늘을 떠돌고 있을 것 같아 「어머니초혼 고양리전」을 열었다. 당시 화실이 있던 경기 고양군 고양리에서 전시회와 함께 일종의 초혼제를 올려 많은 사람이 효의 의미를 되새기게 했다. 북녘 땅이 바라보이는 임진강변과 높은 산 봉우리에 초혼의 깃발을 매단 솟대를 세워 어머니의 혼이 자신의 예술혼과 만나기를 기원했다.
이씨는 지난 1일부터 15일까지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갤러리 미갈」에서 「어머니초혼 고양리전 그 이후」를 주제로 열세번째 개인전을 열고 있다. 25점 모두 화가 자신이 아기가 되어 있는 모자상이다.
필자의 죽마고우인 화랑대표가 심한 치매로 5년째 고생하고 있는 76세의 어머니를 염두에 두고 이화백을 초대한 것이다. 검사였던 남편이 6·25 때 납북당한 뒤 온갖 고생속에서도 몸가짐이 정갈했던 그 어머니가 지금 생의 보람이자 희망이었던 외아들을 「아저씨」 「오빠」라고 부른다니 얼마나 기막힌 일인가.
두 효자를 보면서 나는 19년 전 5월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했다. 그리고 뉘우쳤다. 요즘같은 세상에도 3년 시묘를 한다는데…. 부끄럽기 짝이 없다. 어려서 어머니한테 들은 옛이야기를 잊지 못한다. 고려장이 있던 시절, 길도 없는 깊은 산속에 노모를 버리고 돌아서는 아들의 귓전에 이런 말이 들렸다. 『얘야, 등에 업혀 올라오면서 군데군데 소나뭇가지 꺾어놓고, 열매를 따서 떨어뜨려 놓았으니 그걸 보고 내려가거라』 내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몇시간 전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도 불효막심했던 아들에게 『방바닥이 차니 방석을 깔고 앉으라』고 하셨다. 영원한 이별을 하는 순간인데도.
연보랏빛 라일락꽃 향기가 그윽해지고, 거리에 초파일을 알리는 연등이 피어오르는 5월 이맘 때면 어머니가 서럽도록 그리워 자주 코끝이 싸해진다. 아!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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