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리얼리티 섬세히 포착한 수작/소자본 작가주의적영화 가능성도 보여줘독특한 제목의 영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신예 홍상수감독의 데뷔작이다. 이 작품에는 감독이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관점과 분위기가 차분하게 스며있다. 그래서 「돼지가…」는 상업성을 목적으로 규격화한 이야기 전개나 표현에 치중하는 오락영화의 도식성을 극복하고 있다.
무명의 소설가, 그를 사랑하는 유부녀와 극장 매표원 처녀, 유부녀의 남편 등 네명의 주요 인물이 등장한다. 이들을 각 단락의 주인공으로 설정한 에피소드 형식의 구성은 이 영화가 단순한 이야기식 드라마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대신 등장인물들의 일상적 모습과 현실의 드러난 모습에 관한 묘사를 통해 담담한 느낌의 은유의 세계로 이끌어간다.
「돼지가…」에서 그려지고 있는 사소한 일상의 체험들은 영화 어법의 상투성과 진부함을 탈피하고 있다. 그것은 일상의 리얼리티를 세밀하게 포착해내는 연출력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카메라는 조작된 영화의 눈으로서가 아니라, 고정된 위치에서 있는 그대로를 담아내는 기능을 하고 있다. 이러한 카메라의 관찰자적 시각은 감독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장치이다.
우리 삶의 모습은 의도된 변화와 특별한 경험에 의해서가 아니라 끊임없는 일상의 습관과 우연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감독은 영화의 결말에서 자신의 생각을 힘주어 말하기보다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열린 구조를 택했다.
이 영화의 또 다른 특징은 주연 연기자들 뿐 아니라 조연, 단역들의 연기에서도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허구적이고 전형화된 캐릭터의 설정을 탈피하고, 살아있는 현장의 표면을 집요하게 담아내려는 감독의 관점이 연기자들에게 투영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캐릭터가 관계의 상대성에 따라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는 다중적인 인간의 내면 세계에 관한 치밀한 해석이다. 아울러 인간관계에 대해 경직되고 획일적인 의미를 부여하는데 길들여진 우리를 향해 던지는 곤혹스러운 질문이기도 하다.
「돼지가…」는 일상의 리얼리티가 과장없이 섬세하게 표현된 수작이다. 그리고 우리 영화계에서도 소자본으로 감독의 개성이 담겨있는 작가주의적 영화가 나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반가운 영화이기도 하다.<편장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교수>편장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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