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의 복합성 인식바탕 새이념 모색보편적인 이념과 이론에 대한 신뢰가 무너져 가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젊은이들은 「이성은 행위앞의 노예」를 열창하고 우리의 지적 활동도 느긋이 「읽는 것」에서 순간의 「보는 것」으로 즉물적이 되어가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이념부재의 오늘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진정한 이념의 출현이 멀지 않았다는 징표로 읽혀질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념의 황혼은 새로운 이념의 여명과 그리 먼 거리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요즈음 우리 학계는 하버마스를 비롯해 세계의 석학들을 초빙, 무언가 고견을 듣고 미래의 비전을 세워보고자 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한 가지 흥미있는 사실은 초빙학자의 대부분이 비판적 좌파성향의 인물들로 이는 80년대 이후 우리 학계의 주된 지적 풍토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이념 상실의 시대로의 진입에 가장 큰 변수가 되었던 것이 소련 및 동구권의 몰락이고 보면 이들 비판적 좌파지식인들의 발언이 미래의 대안을 생각하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를 줄 것임에 틀림없다.
바로 이 점과 관련하여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드가 모랭의 「20세기를 벗어나기 위하여」(문학과지성사간)는 우리에게 풍부한 메시지를 보장한다. 본래 마르크스주의자였던 모랭은 소련의 스탈린주의를 비판하고 공산주의에 대한 재평가, 지식인의 역할에 대한 재반성등을 통해 새로운 이념적 개혁을 모색한 바 있다.
특히 81년에 출간된 이 책에서 그는 소련의 몰락을 이미 예언하고 있어 탁월한 선견을 엿보게 한다.
모랭의 사유, 그의 방법론은 무엇보다도 현실의 복합성에 대한 깊은 인식에 입각해 있다. 그는 문명 속의 야만과 현대 속의 고대성을, 이성이 머금고 있는 광기를 마르크시즘을 비롯한 온갖 구원의 이념과 제도 속에서 색출해 낸다. 그리하여 그는 근대 서구의 이성중심적이고 합리주의적인 인식체계를 거부하고 신화와 현실이 교직(교직)된 인간만사를 보다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복합적 사유를 제안한다.
그의 이러한 사유체계는 문명과 야만, 이성과 광기, 동양과 서양이 상호소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죽음과 삶, 절망과 희망도 구체적으로 상호교류하는 열린 회로를 이루고 있다.
이 때문에 모랭은 단순한 비판적 논객에 머무르지 않는다. 반스탈린주의자로 출발하여 이념의 횡포를 고발함에 그치지 않고 사회학 정치학 인류학 물리학 생물학등과의 행복한 결합하에 그는 인류의 새로운 이념적 비전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정재서 이화여대 중문과교수>정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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