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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 지산동 고분(문화유산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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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 지산동 고분(문화유산을 찾아서)

입력
1996.05.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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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무덤군 대가야 옛 영화 묻힌 듯/능선따라 100여기… 마치 성곽처럼경북 고령은 후기가야의 맹주국이었던 대가야의 도읍지이다. 가야산에서 뻗어내려 고령시가지를 감싸고 있는 주산줄기에는 그시절의 영화를 말해주는 무덤들이 길게 행렬을 이루고 있다.

지표조사를 통해 확인된 고분들이 100여기에 이르고 이중에서 왕릉을 연상케하는 대형고분들은 무려 72기에 이른다. 더구나 이 무덤들은 산능선을 따라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고령읍내는 마치 거대한 무덤들로 성곽을 이룬 듯한 모습이다. 신라나 백제의 고도에서 볼수 없었던 것으로 이땅의 무덤들중 가장 장엄한 풍경을 보여준다.

지산동 고분군이라 부르는 이 무덤들은 1906년 일본인들에 의해 파헤쳐지기 시작했다. 고대 일본 야마토(대화)정권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무덤 속에서 쏟아져 나온 유물들은 가야가 일본의 정복지가 아니라 오히려 고대일본문화의 선구자였음을 말해주는 것들이었다.

일제의 도굴이후 방치되다시피했었던 이 고분들은 77년 44호분에서 대규모 순장묘가 발견됨으로써 주목받기 시작했다.

5∼6세기 대가야의 왕무덤으로 추정되는 44호분은 무덤 중앙에 커다란 3기의 석실이 있고 그 둘레에 32기의 작은 석곽이 배치돼 있었다. 석곽에 비해 규모가 큰 3기의 석실중 하나는 왕의 시신이 안치된 주실이었고 나머지들은 부장품을 넣는 방이었다. 그리고 32기의 석곽에서는 모두 24인으로 추정되는 인골이 나왔다. 순장자들의 유골과 부장품들을 분석해본 결과 여러계층의 사람들이었음이 판명됐다. 부장품을 소지하지 못한 이는 노예들이었고 약간의 장신구를 소지한 이들은 왕의 시녀나 시종, 무기를 가진 이는 친위병으로 파악된다. 지산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다양한 철제유물과 순장묘의 존재는 가야가 강력한 왕권체제를 갖춘 고대국가였음을 다시 한번 증명해주는 것이었다.

교통편은 서초동남부터미널에서 고령가는 시외버스가 있다. 고분군까지는 지산동 대가야유물관에서 20분쯤 산길을 올라간다.<이형권 역사기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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