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에서 현악4중주라는 연주형식이 본격적으로 대두한 것은 18세기가 끝날 무렵이다.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이 만든 명곡들로 이 형식이 확고하게 되었고 이후 20세기가 끝나가는 오늘날까지도 이 형식은 시대의 변화에 크게 영향받지 않고 존속되고 있다.괴테는 현악4중주를 가리켜 「교양있는 네 명의 신사의 담화」라고 했다. 누가 특별히 주도권을 잡지 않고 각자 자기 이야기를 하면서도 서로서로를 존중하여 자기 말이 다른 사람과 어울리도록 하고, 어떤 때는 자기 말을 쉬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다가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 주장을 내세워보기도 하지만, 전체로는 이야기의 주제를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노력을 보이는 담화―이런 설명을 굳이 비유랄 것 없이 현악4중주를 담화 그자체로 보고 듣는 것이 올바른 감상일지 모른다.
18세기 말경에 이런 형식이 나왔다는 것은 당시의 계몽주의 사상과 무관하지 않다. 누가 누구를 지배하는 시대가 끝날 무렵에 이 형식이 나온 것이다. 오케스트라단원의 대부분은 실내악을(현악주자라면 물론 현악4중주를) 하고 싶어한다. 어느 특정 지휘자의 주도로 만들어지는 음악과는 달리 실내악은 각자의 말을 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정다운 말을 듣는 기회를 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내악은 다른 형식보다도 더욱 듣는 사람이 연주하는 사람과 대화하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설령 듣는 사람이 없다 하더라도 연주자들은 실내악에서만큼은 자기들끼리 연주하는 맛을 즐기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실내악이 인기가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자동차, 집, 텔레비전 수상기가 크면 무조건 좋아하는 딱한 차원의 멘탈리티가 우선 실내악을 우습게 알도록 하는지 모른다.
게다가 실제 생활에서도 대화가 없는 풍토에서 음악도 대화라는 의식은 꿈도 꾸지 못하는 듯하다. 그리하여 상대방의 말을 듣고 자기의 말을 하지 못하는, 즉 「이야기」를 못하고 산 지 오래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휘몰아치는 큰 것 속에 휩쓸려 「자극」되고 있을 뿐이다.
상업주의라는 선동이 음악을 뒤흔들고 있다. 선동되는 대중은 대화가 없는 아쉬움 속에서 그 아쉬움이 어디서 나오는지도 모르는 채 스스로 선동을 찾고있다.<조성진 예술의전당 예술감독>조성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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