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지치·믈라디치 등 거물급 신병확보 난망/세르비아계 몇몇 하수인 처벌로 끝날 공산커유엔의 역사적인 구유고 전범재판 첫 공판이 헤이그에서 7일 시작됐다. 이번 재판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뉘른베르크, 도쿄(동경)재판에 이은 50년만의 전범재판이라는 점에서 우선 주목된다. ▲종래 「승자에 의한 패자 처벌」로 흘렀던 전범재판의 고정형식에서 벗어나 인류공동체의 이름으로 전쟁행위를 단죄하는 첫 국제 재판이라는 점과 ▲대량학살 방지를 위한 48년 파리협약 및 강간, 고문을 살인과 마찬가지로 전쟁 범죄로 규정한 49년 제네바조약을 처음 적용하는 재판이라는 점에서도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같은 표면상의 의미에도 불구하고 재판의 형평성과 처벌 범위 등에서 많은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으며 이에 따른 비난과 우려도 잇따르고 있다. 일부에서는 『민족갈등으로 뒤엉킨 보스니아 내전을 서방측 잣대로 재단하는 「신인민재판」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비아냥까지 나오고 있다.
93년5월 유엔안보리 결의안 827조에 의거해 설치된 구유고 전범 재판소에 보스니아사태 당시 자행된 「인종청소」혐의로 기소된 전범용의자는 모두 57명에 이른다. 이중 세르비아계는 지도자 라도반 카라지치 군사령관 라트코 믈라디치를 포함한 46명, 크로아티아계는 장군 다리오 코르디치등 8명, 회교계는 군지도자 제닐 딜리리등 3명이다.
그러나 이날 공판정에 선 사람은 92년 말 회교및 크로아티아계 포로에 대한 30여건의 살해·고문혐의로 기소된 세르비아계 교도관 두스코 타디치(40) 혼자였다. 재판소가 신병을 확보한 용의자도 타디치를 포함, 세르비아계군 하수인 3명에 불과하다. 내전의 주범으로 지목된 카라지치나 믈라디치등 「거물」은 수배명단에 오르긴 했으나 구속과 법정인도의 가능성이 전무한 형편이다.
서방측이 95년 11월23일 보스니아 내전 봉합을 위해 데이턴 협정을 체결, 세르비아계의 정치적 실체를 인정한 데다 세르비아계에 대한 카라지치나 믈라디치의 막강한 영향력이 공정한 재판을 가로막고 있다. 이들은 지난해 12월 자신들을 법정에 세울 경우 『보스니아가 또다시 내전의 회오리에 휘말릴 것』이라고 노골적으로 협박하기도 했다.
국제 법학자들의 시선도 곱지 못하다. 2차대전 후 연합국은 전쟁을 완전히 승리로 매듭한 시점에서 패전 독일의 헤르만 괴링장군과 도조 히데키(동조영기) 일본총리를 재판정에 세웠지만 이번 재판은 보스니아 내전의 불씨가 아직 꺼지지 않은 상황에서 무리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시각이다.
결국 이번 재판은 세르비아계 몇몇 하수인의 처벌로 끝날 공산이 커 내전 주범에 대한 「역사의 단죄」라기 보다는 서방측의 형식적인 내전 마무리 수순이라는 분석이 유력해진다.<이상원 기자>이상원>
◎첫 피고인 타디치/극단적 세계 우월론자… 92년 인종청소 실행범
구유고 전범재판에 첫 피고인으로 나선 두스코 타디치(40)는 92년5월 보스니아 북서부 프리예도르 지역에서 시작된 「인종청소」 실행범의 한사람이다. 극단적 세르비아 민족 우월론자인 그는 당시 13명의 회교도를 살해하고 18명을 고문했으며 수차례의 살인을 방조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전범 재판소측은 내전전 카페를 운영하며 가라테 사범직을 맡았던 타디치가 내전 발발 무렵부터 보스니아 포로수용소 간수직을 자청한 뒤 오마르스카등 3개 수용소에서 온갖 잔혹행위를 일삼았다고 전했다. 강간은 물론 회교도 재소자에 땅바닥 흙탕물을 핥아 먹게한 뒤 등에 올라타 무자비하게 폭행하는등 가학증적 행동을 일삼았다고 공소장은 적고 있다.
하지만 그의 어린시절 친구들은 『타디치도 광기어린 내전의 희생자였다』고 변호한다. 내전전에는 회교도와 사이좋은 친구로 지냈고 반 고흐를 존경하며 미술에도 조예가 깊었던 그가 「민족」의 이름으로 치러진 내전의 미친 소용돌이에 어쩔 수 없이 말려 들었다는 주장이다.
두딸의 아버지인 그는 법정에서 자신의 무죄를 입증할 보스니아내 세르비아계의 증언을 요구하면서 단식투쟁을 다짐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과 주변의 변명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눈길은 싸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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