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끝나도 회교도와는 살기힘들다” 마을 떠나/“총성멎어 좋지만 이제 어디로 가야하나” 외침도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 지도자 라도반 카라지치는 95년 12월15일 데이턴 평화협정 조인에 맞춰 전쟁종식을 선언했다. 그로부터 4개월. 세르비아계는 지난 4년간 피로써 지켜온 사라예보 외곽진지들을 순순히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평화이행군(IFOR)측에 내놓았다. 이와함께 보고스차 일리차 그라바비차 등 보스니아 회교정부에 관할권이 넘어갈 5개 사라예보 인근지역에 거주해온 7만여명의 세르비아인들도 보따리를 꾸렸다.
칼 빌트 전스웨덴총리가 이끄는 유엔 민간경찰등 국제사회가 세르비아인들에게 계속 눌러살기를 권했지만 막무가내였다. 문서상의 평화보장에 목숨을 내맡길 수 없기 때문이다.
『회교도들은 약삭빠르고 계산에 밝다. 수백년간 그들과 함께 살면서 우리는 늘 손해만 봤다. 그들과 이웃해 살 이유가 없다』 보고스차의 정든 집을 버리고 떠나는 세르비아계 주민 요반 부사린(46)은 더이상 미련을 두지 않았다. 대부분의 세르비아인들은 회교도를 「돈만 아는 짐승」으로 여겼다. 이는 19세기말 반세미티즘(반유대주의)물결이 유럽을 휩쓸 당시 정형화한 유대인에 대한 평가를 연상시켰다.
이러한 일그러진 인식이 히틀러의 「홀로코스트(유대인대학살)」를 유발시켰듯이 회교도를 대상으로한 집단학살및 추방 등 인종청소를 가능하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회교도들은 시골에서 농사나 짓던 우직한 세르비아인들을 등쳐먹고 잘 살았다. 돈 좀 있다고 우리에게 얼마나 몹쓸짓을 했는지 아느냐. 인종청소는 그 대가를 치른 것이다』 세르비아계 한 주민은 치를 떨었다.
14쪽에 이르는 데이턴협정을 평화안이라기 보다는 「항복문서」로 받아들이는 세르비아계도 많다. 실제로 수천명씩 떼를 이뤄 사라예보를 등지는 세르비아계 주민들의 대탈출의 모습은 패잔병 행렬을 연상시킨다.
드리지차 스타니치할머니(78)는 『우리는 모든 것을 잃었다. 어디로 가라는 말이냐』고 흥분했다. 그 옆에는 『미국이여, 평화는 고마우나 우리는 이제 어디로 가야하느냐』고 쓴 플래카드가 나부끼고 있었다.
데이턴협정에 대한 세르비아계의 반발은 점령 지역을 회교도측에 넘겨주어야 하는 시한이 임박하면서 여러 형태로 나타났다. 주민들은 쓸만한 가재도구를 걷어낸뒤 불을 지르거나 중장비를 동원, 아예 건물 자체를 무너뜨렸다. 맨주먹으로 떠나야 할 그들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앙갚음이었다.
세르비아계가 회교도측에 가장 먼저 넘겨준 사라예보 외곽지역은 보고스차이다.
회교·크로아티아계 경찰이 2월말 보고스차에 들어갔을 때 남은 것은 폐허뿐이었다. 불탄 지붕, 무너진 벽, 산산조각난 유리, 텅빈 주택들…. 1만7,000여 주민들이 거의 떠나버린 시가지는 마치 폭격이라도 당한 듯 성한 것을 찾기 힘들었다.
사라예보공항과 이그만산으로 이어지는 전략 요충지 일리차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생필품을 사라예보에 공급하는 젖줄로 내전 도중 상당히 흥청거렸던 이곳은 평화협정체결과 함께 찬바람이 몰아치더니 끝내 폐허가 되고 말았다.
『지난해 6월 회교도측이 사라예보 공항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일리차에 총공격을 감행했으나 실패했다. 그런 일리차를 피 한방울 안흘리고 회교도측에 내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고 주민들은 흥분했으나 대세는 이미 기운 뒤였다. 사라예보 중심가에 인접해 있는 그라바비차가 지난달말 회교도 손에 넘어가면서 세르비아계의 민족 대이동은 끝났다. 이웃에 살다가 서로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눴던 양민족은 결국 구원을 삭이지 못해 갈라서는 길을 택한 것이다.
이같은 세르비아계의 「엑소더스」에는 지도부의 부추김도 한 몫했다. 「남아 있다가는 회교도의 보복대상이 되고 만다」는 흉흉한 유언비어와 소문이 난무했음에도 불구, 데이턴 평화협정을 추인했던 카라지치와 세르비아계군 총사령관 라트코 믈라디치 등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나아가 이들이 소문의 진원지라는 추정이 설득력을 더했다. 이는 민족적 이기주의를 선동해 전쟁으로 몰아갔던 정치지도자들이 아직도 「대세르비아 건설」의 꿈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또한 전범 명단에 올라 있는 이들이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무고한 주민들을 「인질」로 삼고 있다는 비난도 나왔다.
하지만 대세르비아를 꿈꾸며 4년간 투쟁해온 두 사람의 노력도 세르비아계의 긴 탈출행렬과 함께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는 느낌을 끝내 지우기 힘들었다.
◎세르비아계 「수도」 팔레/내전 발발하자 천연의 전략요충지로/이젠 예전의 한가롭던 모습 되찾아가
보스니아 세르비아계의 「수도」 팔레로 가는 길은 험하고도 가파랐다. 사라예보에서 밀리아스카강을 건너 그라바비차 뒷산등성이로 난 산악도로를 자동차로 40분가량 달리자 팔레는 「한폭의 그림」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하지만 이 도로를 달려보니 팔레를 근거지로 한 세르비아계측이 4년여동안 어떻게 사라예보의 목줄을 쥐고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산허리를 통나무 방벽으로 막아 구축한 곳곳의 진지에서는 사라예보시내가 손에 잡힐듯 다가왔다. 30여명의 희생자를 낸 사라예보 마르칼레시장의 참극도 이곳에서 쏘아댄 로켓과 박격포탄때문이었다.
팔레는 내전전만 하더라도 인구 1만여명에 산업기반이라고는 목재공장 한 곳이 전부인 조그마한 산간마을에 불과했다. 그러나 내전이 발발하자 사라예보에서 가까운 천연의 전략요충지라는 점에서 세르비아계의 수도가 됐고 급격히 변해갔다. 군사령부와 의사당이 들어서고 아파트단지는 야전병원으로 급조됐다. 노인들이 한가로이 체스를 두던 마을회관은 전선의 병사들을 독전하는 방송국으로 바뀌었다.
데이턴평화협정 체결로 팔레도 이제 예전의 모습을 되찾고 있다. 하루종일 거리를 질주하던 장갑차와 군용차, 부상병을 실어나르던 구급차가 자취를 감춘 대신 이삿짐을 실은 자동차, 달구지가 가끔 나다닐 뿐이다. 최근에는 전폭기를 동원해 팔레에 집중 공습을 가했던 나토 평화이행군(IFOR)의 레이턴 스미스 사령관도 다녀갔다. 방송국앞에서 과일을 파는 릴리야 시드란여인(56)은 『사라예보에서 온 피란민만 없다면 평화롭던 팔레로 되돌아간 느낌』이라고 밝혔다.
◎세르비아계 여전사 스보토 스티나다/“우리는 평화의 난민… 생활터전 모두 잃어”
『우리는 회교도와 함께 살 수 없다. 평화협정으로 우리는 지금까지 닦아온 생활터전을 내놓고 떠나야 했다. 우리는 평화의 난민이 됐다』
스보토 스티나다(여·45)는 내전기간에 회교도와 세르비아계간의 최전선이던 사라예보의 「브라트스트바 이 에딘스트바(일명: 돌아오지 않는 다리)」초소를 지키던 세르비아계 병사다. 데이턴 평화협정에 따라 거주하던 그라바비차를 떠나 팔레에 온 그는 이 협정을 「세르비아계의 항복문서」라고 잘라 말했다. 그라바비차는 남북으로 갈라졌던 사라예보의 남쪽지역내 세르비아계 중심지였다. 내전중 사라예보의 회교도가 안심하고 거리를 나다닐 수 없었던 것도 바로 밀리아스카강 건너 그라바비차에서 날아오는 저격수의 총알때문이었다.
놀랍게도 스티나다는 남장군복을 입은 중년 여성이었다. 두툼한 점퍼에 권총을 찬 그는 스스럼없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지만 여전히 손끝은 여렸다. 곁에 있던 남자동료는 세르비아 최고의 전사라는 의미로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웠다.
교통경찰관으로 근무했던 그는 남편과 3명의 자녀와 함께 사라예보 회교도지역에 살았었다. 그러나 내전이 터지며 이웃의 다른 세르비아계들처럼 그의 가족들도 동족이 모여사는 그라바비차를 향해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넜다. 함께 군복을 입고 총을 잡았던 남편은 내전의 와중에 전사했다.
그는 장래의 계획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남편이 목숨을 바친 곳을 회교도에게 넘겨준 게 억울할 뿐 무엇이 더 필요하겠느냐』고 반문했다. 이어 『가져온 것도, 앞으로 가져갈 것도 아무것도 없다』며 그는 허탈해 했다.
당초 그의 꿈은 고향인 사라예보를 세르비아계 도시로 만드는 것이었다. 자식들에게 나마 「공포없는 세상」을 남겨주고자 한 간절한 소망 때문에 거침없이 전선을 누비고 다녔다. 그럼에도 오히려 그라바비차를 적에게 넘겨준 그의 심정은 절망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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