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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순결심 들킬까” 불안한 영생활(평양서 서울까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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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순결심 들킬까” 불안한 영생활(평양서 서울까지:중)

입력
1996.04.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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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무용배우 신영희/어린 아들도 “평양 보낸다” 겁 주면 말 잘들어/IMO 북대표부 도움요청 거부이유 감시 시작/“결국 탈출뿐” 「볼모」 딸 뇌물주고 런던 데려와『너 말 안들으면 평양에 보낸다』

영국에 살던 북한 무용배우 출신 신영희씨(34)는 아들 창혁군(9)이 말을 듣지 않으면 이렇게 겁을 주었다. 그러면서 그때마다 서글퍼지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창혁이가 이 말을 들으면 말을 잘듣고 고분고분해졌다는 점이다. 창혁이는 조국인 평양에 돌아 가는것을 매우 싫어했다.

신씨는 93년 외환딜러인 남편 최세웅씨(34)를 따라 영국으로 건너와 런던 교외에서 살다가 95년 12월 창혁군, 딸 송희양(6)과 함께 전가족이 귀순했다. 남편 최씨는 김일성종합대 독일어과를 졸업한 엘리트로 90년부터 영국의 북한·영국 합작 개발투자회자(DEVELOPEMENT AND INVESTMENT COMPANY) 사장으로 활동했다.

신씨는 남포시 태생으로 북한주민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던 만수대예술단의 무용배우 출신이다. 사회 물정 모르고 북한과 김일성과 김정일이 최고인 줄로만 알고 곱게 살아왔던 신씨는 자본주의의 싹을 틔운 영국에서 세상을 다르게 보게 됐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북조선에서 왔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신씨 가족은 서울의 유인요소보다 평양의 유출요소 때문에 귀순한 것이다.

신씨의 얘기를 들어보자.

『영국에서는 마음껏 행동할 수 있다는 데 놀랐어요. 북한사회에 대한 실망감이 커졌고 북한경제의 낙후성이 자꾸만 떠올랐어요. 갈수록 북한이 멀게만 느껴졌죠.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북한에서 왔다고 말하기가 꺼려졌어요. 그래서 그냥 「한국(코리아)」이라고만 말했지요. 북한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알아듣지를 못했어요』

평양에서도 사회물정에 무심했던 신씨는 영국에서도 바깥세상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고 살았다. 아는 사람이라곤 런던주재 국제해상기구(IMO) 북한대표부의 대표, 부대표 부부 정도였다. 남한출신으로는 남편이 소개해준 조신구라는 사람을 두어번 만나봤을 뿐이다.

『운전면허를 따서 아침에 아들을 학교에 보내고 하오에 데리고 오는 일이 고정 일과였어요. 그외에는 주로 TV시청과 쇼핑, 동화책 속의 그림같은 영국 교외 풍경 구경이 고작이었죠. 남편의 업무가 돈을 다루는 일이어서 생활에 큰 어려움은 없었어요. 한달에 생활비 500파운드를 받아 썼는데 100파운드 이상을 저축할 수 있었고 몰래 「비자금(서울에 와서 배운 말이다)」을 만들다 들켜서 혼이 나기도 했어요. 주말이면 놀이터나 지방으로 가족 나들이를 나갔고 어린이 장난감을 사곤 했지요』

그러나 신씨는 남편의 생각이 뭔가 심상치 않다는 것은 눈치챌수 있었다.

『남편은 영국에 왔을 때부터 되돌아 가지 않겠다는 마음을 은근히 내비쳤어요. 처음에는 펄쩍 뛰었는데 나중에는 남편이 자본주의에 물들어 실수를 할까 봐 걱정했지요. 런던에는 IMO 북한대표부의 대표, 부대표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혹시 남편이 이들에게 속마음을 들키면 어쩌나 해서 마음을 졸였지요. 그래서 정신적으로 편할 때가 없었어요. 한번은 남편이 부대표 부인과 싸우면서 변절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는데 그 때는 정말 불안했어요』.

런던에 북한인이라고는 이들 세가족만 달랑 나와 있었지만 서로 의지하기는 커녕 만나면 다투기 바빴다.

『일주일에 한 번 만나서 사상학습을 하면 끝이에요. 대표·부대표 부부는 북한의 외화부족으로 생활비와 건물유지비를 제대로 받지 못해 우리에게 자주 손을 내밀었어요. 한 두번이 아니어서 만나는게 부담스러웠어요. 공식월급이 대표는 한달에 300파운드, 부대표는 200파운드 정도였지만 지급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던 것 같아요』.

창혁이는 『평양보다 런던이 좋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창혁이는 평양에 있을 때도 탁아소에 보내지 않고 집에서 키웠기 때문에 김일성·김정일에 대해서는 「정신자세」가 투철하지 않았고 그래서인지 영국 학교에 잘 적응했다. 창혁이는 집에 가구수리원 등 영국인이 찾아오면 통역을 맡아 어머니 신씨를 기쁘게 했다. 신씨도 어느새 평양에 되돌아가면 곤란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남편 최씨는 지난해 4월 평양에 남아있던 딸 송희양도 영국으로 데려왔다. 북한은 원래 해외주재원의 자녀 중 1명은 볼모격으로 본국에 남겨두는데 최씨는 딸을 데려오기 위해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가 관장하는 「조선통일발전은행」에 100만달러를 뇌물로 집어넣었다.

신씨는 몰랐다고 하지만 남편 최씨의 업무중에는 김정일에게 비자금을 조성, 상납하는 일도 포함돼 있었다. 남편 최씨는 당재정경리부장이었던 아버지 최희벽이 말 한마디 실수로 좌천되는 것을 보고 북한 최고위층의 생리를 잘 알게 됐다. 최씨는 김정일이 해외무역상사와 국내기관을 통해 지금까지 10억∼20억달러의 비자금을 조성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최씨는 결국 런던주재 국제해상기구 북한대표부의 유지비 요청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감시를 받게 됐다.

다시 신씨의 얘기. 『남편이 지난해 11월께 북한에 출장을 갔다 오더니 소환 지시가 떨어졌다면서 우물쭈물할 시간이 없으니 빨리 결심해야 한다고 말했어요. 자주 듣던 얘기라 놀라지는 않았지만 정말 북한에 부모님, 형제(남동생 2명과 여동생 1명)가 없었으면 얼마나 속이 편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남편의 설득을 받아들여 자식들을 생각해 모질게 결심했지요. 그러자 10년전에 방문했던 서울이 생각 나더군요』

『영국에 와서는 귀순한 고영환씨(전직 외교관)를 인터뷰한 비디오나 한국 책자를 많이 봤기 때문에 서울에 가서 살면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됐지요. 역시 귀순한 김용씨 얘기도 많이 들었는데 김용씨는 북한에서 같은 예술인으로 함께 지낸 적이 있어 전부터 아는 사이였지요. 그리고 그 때쯤에는 이미 남쪽으로 넘어가는 사람이 많다는 정도의 얘기는 듣고 있었어요』

대사관처럼 단체생활을 하면 상호감시를 하기 때문에 탈출에 어려움이 많지만 신씨 가족은 따로 살았기 때문에 몰래 움직이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이들이 한적한 야외에 나가 영국의 한국대사관에 전화를 건 것은 지난해 11월말 이었다.<특별취재반:김병찬 정치2부 기자 김관명 사회1부 김경화>

◎김정일의 비자금/10억∼20억불 규모 해외은닉/스위스·홍콩 등지에 3자 명의로 입금/무기수출 등 통해 연6천만불선 비축

신영희씨 부부는 영국에 머무르면서 김정일의 비자금 조성에 참여했다. 신씨의 남편 최세웅씨는 북한 최고의 외환딜러였기 때문에 이들 부부는 자연스럽게 김정일의 사금고안을 들여다 볼 기회가 많았고 베일속의 실상을 대강이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신씨는 『남편은 외환시세를 파악, 평양에 보고하고 지시를 받느라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고 출장도 잦았다』고 말했다. 남편 최세웅씨는 상부 지시에 따라 평소 관리하던 2,000만달러 가량을 마카오로 송금한 적이 있으며 대외무역총국도 비슷한 액수를 매년 상납했다고 밝힌 바 있다.

신씨 부부에 따르면 김정일의 비자금은 현재 10억∼20억달러 수준. 이 돈들은 스위스·홍콩·오스트리아·마카오 등지에 제3자 명의로 입금돼 있다. 식량난을 겪고 있는 북한주민들을 먹여살리고도 한참 남을 액수다.

김정일의 비자금은 크게 1차 상품 수출, 중계무역, 그리고 외환거래 이익금 등으로 거둬들이는 외화로 구성된다. 북한은 금과 송이버섯, 명태 수출로 매년 2억달러 가량을 벌어들인다. 중계무역에 의한 비자금 확보방법도 있다. 일제 중고자동차 등을 들여와 중국에 되파는 것이 이에 속한다.

또 비자금에는 무기수출대금, 조총련과 지도층 간부들이 직접 바치는 충성금도 포함된다. 무기판매 대금의 경우 시리아 등의 중동국가에 수출되는 미사일 수출액만 연간 5억달러에 달해 규모가 상당하다.

이 자금들은 북한 최대의 무역회사인 대성총국이 소속된 노동당 39호실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김정일에게 곧바로 상납되고 김정일 서기실에서 직접 관리한다. 그래서 비축되는 비자금은 매년 6,000만∼7,000만달러.

그러나 김정일에게 올라간 돈은 결코 내려오는 법이 없고 그의 지시 없이는 1달러도 쓸 수 없는데다 공개되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 개인 비자금으로 전용된다는 것이 신씨 부부의 증언이다.

신씨 부부는 관리인으로 김정일서기실의 권영록을 지목하고 있다. 권은 60대로 호위총국 출신(우리의 청와대 경호실)이다. 김정일을 20년동안 그림자처럼 따라다닌 최측근. 김정일 집무실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심복으로 한달중 보름 정도는 해외출장을 다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해외로 나온 경제전사들은 비자금 조성뿐 아니라 유사시 전쟁 물자와 자금을 조달해야 하는 이른바 「붉은 자본가」의 역할까지 맡고 있다. 「붉은 자본가」는 92년 김일성이 김정일을 배석시킨 자리에서 「해외 회사기지」를 튼튼히 차리라고 교시하면서 양성됐다. 영국 독일 미국 프랑스 싱가포르 홍콩 등 자본주의 국가에서 무역대표부나 합작회사 형태로 이들 「붉은 자본가」들이 활동하고 있다. 물론 영국에 머물렀던 신씨 부부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김정일의 비자금 비축 여건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다. 수산물 등 1차 생산물이 철도와 도로 등 교통사정의 악화로 적시 수송이 이뤄지지 않아 가격설정에 손해를 보고 있으며 일제 중고차의 대중국 판매 역시 중국 당국의 감시가 심해져 여의치 않은 실정이다. 미사일 수출 역시 국제 문제로 비화돼 여론이 악화하고 있다. 최근들어 해외의 경제전사 외환딜러들은 신속한 의사결정이 생명인 외환시장에서 본국의 경직된 결재시스템과 후진적 정보체제로 고전하고 있다.

◎북한 대중음악 실정/연변교포 통해 남한가요 은밀 확산/고위층 자제 테이프 한두개쯤 지녀

신영희씨는 북한에서 중국 연변을 통해 들어간 남한의 대중가요가 유행되기도 했다고 북한의 대중음악 실정을 전했다.

신씨의 얘기를 토대로 북한의 대중음악세계를 알아본다.

북한 젊은이들 사이에 「보천보전자악단」 「왕재산경음악단」의 인기는 대단하다. 80년대 중반 TV를 통해 대중 앞에 선보인 이들 예술단은 현대적인 분위기로 북한 주민들을 대번에 휘어잡아 버렸다.

이전의 혁명가극이나 혁명가요와는 판이하게 다른 대담한 서구식복장과 파격적인 율동, 전자기타 드럼 키보드 등 현대적인 악기가 엮어내는 경쾌한 리듬은 이들 예술단만의 색다른 매력이다. 이들은 주로 「김치 깍두기 맛 참 좋수다」「아리랑」 등 「부담없는」내용을 담은 노래를 부른다. 남한에 잘 알려진 노래 「휘파람」을 부른 가수 전혜영도 보천보 전자악단원이다.

이들 예술단이 일반에 직접 나서는 일은 드물다. 왕재산경음악단의 경우에는 평양대극장 등 북한 일류극장에서 일반공연을 3∼4회 갖기도 했으나 보천보전자악단의 모습은 TV에서나 볼 수 있다.

중앙당 선전부 직속인 이들 예술단은 김정일이 각별한 관심을 쏟고 있다. 김정일이 직접 카메라테스트를 실시해 외모와 체격조건이 빼어난 남녀연예인을 선발하며 결혼하면 활동에서 제외된다. 예전에 만수대예술단이 도맡던 국가행사성 공연도 이들 예술단이 주로 하고 있다. 북한의 일류호텔인 평양 고려호텔에서 외국인을 위한 나이트쇼를 정기적으로 갖기도 한다.

북한에는 중국 연변동포를 통해 북한에 흘러들어가는 남한의 대중가요도 은밀히 확산되고 있다. 일반인들은 구하기 힘들지만 북한 고위층 자제들은 남한 노래 테이프 한두개쯤은 갖고 있다.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옥경이」등 트로트성 가요가 인기이며 가수 나훈아의 이름도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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