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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의 아픔 애절한 시어로 삭여내고…/박재삼 병상 신작시집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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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의 아픔 애절한 시어로 삭여내고…/박재삼 병상 신작시집 출간

입력
1996.04.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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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병 반년만에 「다시 그리움으로」 엮어내/다가오는 죽음·노년 외로움 담담히 노래「저 나뭇잎이/ 한창 힘을 내고 필 적에는/ 여름을 향해서이고/ 그것도 푸른 빛만을 다스려/ 곁에는 항상/ 미풍을 거느리고/ 쇄애쇄애/ 연한 기운으로 오고 있네.// 그러나 묵묵한 가운데/ 곱게 치르고 있는데,/ 똑똑하고 말이 많은 사람은/ 어떤 때는 붉은 빛/ 어떤 때는 노란 빛만 띠고/ 그것이 폭풍을 안고 오거나/ 별 지랄을 다 부려/ 한없이 부끄러울 따름이라네」(「나뭇잎을 보며」).

시인의 영혼은 썩지 않는다. 욕심도 권력도 시인의 영혼을 때묻히지 못한다. 시인의 정신을 옥죄는 것은 그의 영혼이 담긴 집이 낡아 허물어져 갈 때 뿐이다. 지난해 가을 지병악화로 쓰러졌던 시인 박재삼씨(63)가 새 시집 「다시 그리움으로」(실천문학사)를 출간했다. 김소월 서정주로 이어지는 전통 서정시의 맥을 잇고 있는 그가 62년 처녀시집 「춘향이 마음」을 낸 이후 열여섯 권째이다. 매일 네 차례 신장투석을 해야 하는 만성신부전증에 고혈압 합병증으로 시달리는 그는 서울 중랑구 묵동 집에 누워 하루하루를 보낸다. 지난 달 초까지 여러 달 입원해 있으면서 두 차례 신장수술을 받았고 혈관이 막혀 피가 돌지 않아 썩어 들어간 발가락 몇 개를 잘라냈다.

이번 시집은 91년 「꽃은 푸른 빛을 피하고」를 낸 뒤로 처음 나온 것이다. 노년의 외로움에다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심경, 「아파서 아무 데도 못 나가고/ 그저 앉아서 전화나 받는다」고 병마에 지친 아픔을 독백하듯 담담하게 써 냈다. 약해진 마음구석을 드문드문 내비치는 구절과 마주칠 때는 안타까움이 불쑥 솟아 오른다. 「늘 돈은 조금만 있고/ 머리맡엔 책만 쌓이고/ 그 책도 이제는/ 있으나마나한데/ 땅 밑에/ 갈 생각만 하면/ 나는 빈 것뿐이네」(「허무의 내력」).

『다시 시를 써야죠. 그런데 기억이 자꾸 흐려져요. 엊그제 병문안 왔다 간 사람이 하루 지나면 누구였더라, 기억이 가물가물해요』 박씨는 이렇게 말하며 마른 얼굴에 미소를 떠올렸다. 큰 일 당할 줄로만 여겼던 그의 건강은 하지만 용케 회복중이다. 매주 한 차례 통원치료를 받던 병원에도 이달부터는 한 달에 한 번 갈 정도가 됐다. 어렵지만 긴한 시 몇 자 정도는 다시 쓸 수 있게도 되었다. 지난해 가을 펜을 놓은 이후 반년만이다.

하루 거동이래야 안방과 마루를 오가는 정도이고 간신히 힘을 내면 마당까지 나설 수는 있다. 그는 시는 건강이 웬만해지는대로 적으나마 쓸 수 있겠지만 좋아했던 바둑을 두거나 잘 어울렸던 기사들을 한국기원에서 다시 만나기는 힘들 것 같다고 아쉬워한다.

박씨를 돕기 위해 서벌, 노향림시인등을 중심으로 문인들이 모은 돈은 3,000만원 가까이 된다. 많은 문인들이 그의 새 시집을 많게는 250권에서 10권에 이르기까지 모두 2,000부 가량 미리 구입신청했다.<김범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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