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학당한 졸개깡패가 교문 옆에 지켜서서 낯익은 급우들을 괴롭힐 때가 더러 있다. 우리 학생때는 당시로선 귀했던 시계를 잘 뺏겼는데, 기막힌 것은 수탈대상에서 면제받는 특수층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즉 운동선수, 태권도반원, 학생간부를 보면 산적쪽에서 씩 웃고 통과시키고, 우등생에게는 『임마, 공부 잘해!』라는 격려를 해 주는가 하면, 키가 작거나 약골인 학생에게는 『젖 좀 더 먹고 다녀!』라는 농담을 던진다. 따라서 당하는 군상들은 그 어디에도 끼지 못하는 나같은 보통학생이다. 우리 오합지졸로서는 도망치자니 창피하고, 대항하자니 용기도 힘도 없고, 아부하자니 웃음부터 일그러져 나와 상대가 오해해서 더 때린다. 이럴 때 살 길이란 그날 그날 상대방의 호의에 기대를 걸며 땅만 보고 걷든가, 아니면 맷집을 키우는 것이다. 아침 저녁 집마당에서 혼자 하는 도수체조와 아령으로 근육을 키워 놓으면 상대를 정면에서 거절해도 몇 대 맞는 것으로 시계를 지키게 되어 그런 쪽을 아마도 대다수 급우들이 택했던 것이 아닌가 기억한다.코피 터지고 땅바닥에 주저앉기는 할망정 큰 상처 입지 않고 꾹 참고 일어나 뒷 일을 기약하는 「맷집키우기」, 바로 이것이 국가로 치면 민방위인 셈이다. 비전투원 국민들로 하여금 피아간 포화 속에서 살아남게 하여 당당하게 미래를 기약할 꿈과 힘을 길러주는 것이 바로 「민방위」다.
휴전선 가까이 사는 국민일수록 살랑거리는 북풍일지라도 삭풍으로 통하는 요사이 나는 민방위 훈련시간을 서울시청에서 8 떨어진 대로상에서 맞아 몇년만에 모처럼 시가지 훈련상황을 비교할 기회를 가졌었다. 그런데 결과는 실망이 크다. 우선 거리에 나선 민방위요원 수가 전보다 적었다. 또 호루라기, 모자, 완장 가운데 완장 하나만이 보였다. 승용차는 그대로 길 복판에 놓아두고 트럭만을 보도 옆에 대게 하였고, 요원들 기세가 전보다 훨씬 못하였다. 방송 아나운서 목소리도 너무 차분해져 긴박감이 묻어나지 않았다. 듣고 있노라니 자연 6·25때가 생각났다. 밀려드는 인파로 조금 있으면 식료품점이 문을 닫고, 몇시간만 지나면 현금이 떨어진 은행이 셔터를 내리고, 그리고 교통수단이 없어져 모든 사람이 걸어다니던 일이 생각났다. 또 가족친지 사이에도 서로가 없다고 우기던 쌀, 아버지 양복을 팔려고 헤매던 동대문시장 풍경도 내 머리를 스쳤다. 다른 한 편에서는 이것이 실제상황이라면 나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하는데도 생각이 미쳤다. 의문도 생겼다. 구급세트는 어디서 사는가, 며칠분의 식량을 준비해야 하는가, 고층아파트단지에서 지하대피는 어디로 해야 하는가 등등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요컨대 민방위만큼은 제대로 해야겠다. 그리고 정부가 적극 나서야 겠다. 민방위는 민간인이 전쟁에서 살아남는 데에 주안점을 두는 것이기 때문에 「호전적」이라거나 「북을 자극한다」는 비난을 받을 것이 못된다. 민방위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가정마다의 생활필수품 비축이다. 2년전 북핵위기와 「서울불바다」경고를 맞은 서울시는 생필품 비축과 구급기구 구입을 시민에게 권하는 성명을 발표했던 적이 있었는데, 어느 한 신문만 빼고 언론이 이를 홍보해주지 않았었다. 그리고 그 며칠 뒤 「서울시가 호들갑을 떨어 사재기를 선동해서 민심을 소요케 하였고 불필요하게 북을 자극했다」는 일부 언론의 주장이 강해져 궁지에 몰린 서울시는 「부시장이 회의답지 않은 회의에서 가볍게 언급한 것이 그만 과대홍보가 되었다」고 머리 숙인적이 있었다. 그러나 뒤에 당시의 위기는 국내에서는 보도가 덜 되어 잘 몰랐었지만 실제는 아주 심각했었다는 것으로 판명된 바 있다.
그러니 이번에는 그때처럼 적당히 넘기지 말았으면 한다. 민방위재난통제본부는 필수비축품의 양을 국민에게 알려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이왕이면 그런 물품들을 함께 모아 하나의 세트로 상자 속에 넣어 동사무소나 일반 상점에서 팔게 했으면 한다. 웃긴다고 사람들이 잘 사지 않으면 우선 공무원, 국영기업체와 대기업의 임직원들에게 배급하고 비용은 월급에서 할부로 공제하면 어떨까 한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따를 것이다. 혹은 반대로 사재기가 일어나면 그때는 지역별·지구별로 날짜를 달리해 배급할 수도 있겠다. 다행히도 중국이 4자회담을 지지하고 있으며, 북·미회담이 동시다발적으로 열리고 있어 우리 민방위로서는 당분간 시간을 벌게 된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면 한다.
의사는 환자에게 수술대 위에서 맞을 수 있는 1%의 위험성도 미리 알려주어 마음의 준비를 시키는데 하물며 한반도 전쟁발발률 15%를 점치는 외신을 접하는 우리 국민을 위해 정부는 할 일을 해야 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정부가 권장하는 「적절한 사재기」를 가정마다 해 놓아야 민관이 함께 위기에도 의연할 수가 있다.
그리고 북에 쌀 보내는 것도 정부 차원에서는 이런 연후에라야 말을 꺼내는 것이 순리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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