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이 보이지 않는다. 서점은 늘어나는 책의 물량을 견디지 못해 난장으로 변한지 오래인데, 유독 시집만이 보이지 않는다. 혈안이 돼서 찾아야 저 한 귀퉁이로 그것들이 쫓겨나 있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 모양이 꼭 성냥팔이소녀가 쪼그려 앉은 꼴이다. 몇몇 인기시인들의 시집들, 그리고 이제는 그마저 팔리지 않는 10대소녀 취향의 낙서시집들이 누렇게 바래가며 꽂혀 있다. 그리고 몇 권의 신간들. 산업화가 절정에 달했던 70년대말 김현선생은 시의 몰락을 비장한 어조로 예언했었다. 그 예언은 10년이 지난 후에 들어맞았다. 그 10년은 군사독재가 아무런 까닭도 없이 폭력적으로 연장된 기간이었다. 그 기간은 정말 시의 시대였다. 그리고 느닷없이 시에 정적이 찾아왔다. 여론조사를 안해도 그 때는 소설이 문화산업의 회오리를 타고 참새떼처럼 날아오른 때와 한 치의 오차도 없다.시집을 찾을 수 없어서 나는 다시 잡지를 뒤적인다. 우울하게, 심드렁하게, 건성건성 뒤적이다가 최승호의 「뿔쥐」(「문학사상」 4월호)에 문득 눈길이 멈춘다. 그도 세상이 마냥 허무하기만 하다. 이 문화산업의 시대에는 헛것들만이 판친다. 뻐꾸기시계가 뻐꾸기를 대리만족시켜주는 시대, 「이미테이션이 보석을 앞지르는 시대」 이 시대에는 좌판 위에서 뿔뿔거리는 「뿔쥐가 고양이들을 놀라게 한다」 이런 시대는 「고향이 없는」 시대라고 첫 행은 엄숙하게 선언한다.
그러나 그 선언은 「한밤의 딸꾹질」처럼 허망할 뿐이다. 고향상실은 무차별적이어서, 세상만이 아니라 시인 자신도 이미 헛것처럼 변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의 핵심은 그 허무의 토로에 있지 않다. 그렇다고 「헛살았다고 중얼대는 것은/흔해빠진 일이다/그 다음을 말하기가/어려울 뿐이지」 그렇다. 그 다음이 중요한 것이다. 하긴 생각해보면, 시란 본래 가장 큰 헛것이 아니었던가? 실재론의 시조인 플라톤이 그를 쫓아내려고독심을 먹을 정도로. 그 큰 헛것이 작은 헛것들의 레밍스(나그네 쥐)적 침략에 쫓기고 쫓겨 삼도천 앞에 서 있다. 그는 이제 죽음을 건너는 법을 익힐 때가 온 것이다. 그 길이 어디인가? 나는 정면으로밖에는 그 길이 보이지 않는다. 저 뿔쥐들의 한 복판. 다시 말해, 모든 헛것들이 스스로를 진짜라고 우기는 아수라의 한복판말이다.
그것은 바로 시가 가르쳐준 것이었다. 작은 헛것들은 시의 가르침을 먹고 이렇게 들끓게 되었다. 그러니, 시의 문화산업과의 싸움은 바로 그 자신과의 싸움이 되지 않을 수 없다. 한밤의 딸꾹질은 그러니까 그저 허망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싸움의 시작종이다.<정과리 문학평론가·충남대교수>정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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