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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맞게 돼있었던 여론조사(박완서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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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맞게 돼있었던 여론조사(박완서 칼럼)

입력
1996.04.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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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대 국회의원 선거날 밤, 자정이 넘도록 혼자서 TV를 지켜보았다. 특별히 관심가는 지역이나 당선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입후보자가 있어서가 아니라 순전히 타고난 짓궂은 심보 때문이었다.투표가 끝난 직후, 각 방송사는 선거결과 예측방송이라는 걸 내보내면서 이제 유권자들은 개표결과를 밤 새워 지켜보지 않아도 되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고까지 확신에 찬 호들갑을 떨었다. 여론조사결과는 여당의 압승이었다. 그때 나는 그건 절대로 들어맞지 않을 거라고 내다봤고, 그걸 확인하고 싶은 짓궂은 호기심이 스멀스멀 동하는 걸 느꼈다. 그런 짓궂은 마음은 여당이 안되기를 바라는 것같은 감정적인 차원과는 다른, 내 나름으로는 제법 분명한 근거를 댈 수 있는 추리를 거친 거였다.

나도 이름있는 여론조사기관으로부터 전화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선거 열흘전쯤이었으니 누구를 찍겠느냐는 질문은 아니었고, 네 정당을 놓고 점수를 매겨보라는 좀 별난 주문이었다. 나는 거침없이 여당에 가혹한 점수를 매겼고 나머지 세 당은 그걸 기준으로 조금 나은 점수를 주기도 하고, 못한 점수를 주기도 했는데 평소 가장 싫어하던 정당은 영점을 주었다. 영점이라고 크게 말할 때 감정이 정화되는 듯한 쾌감을 느낀 것 외에는 가볍게 응한 여론조사였다.

○“뭘 그리 솔직해”

문제는 그 다음, 내 태도를 관찰하고 있는 또 다른 여론이었다. 그때 마침 집에는 나 혼자 있지 않았고, 여러 친구들이 무슨 모임 끝에 우리 집으로 몰려와 차를 마시고 있었다. 내가 대답하는 걸 들은 그들의 반응이 재미있었다. 뭘 그렇게 기를 써가며 솔직하게 구느냐는 거였다. 나는 하나도 기를 쓴 바 없는데도 그들 눈엔 그렇게 보였고, 그게 딱한 눈치였다. 그냥 듣기 좋게 얼버무리지 왜 그렇게 똑떨어지게 굴었느냐는 소리도 나왔다. 상대방은 여론 조사기관일뿐 개인의 성분을 조사하는 정보기관도 아니고, 또 정보기관이라 해도 여당을 지지하지 않는 것이 죄가 되는 세상이 아니라고 우겨도 나를 딱해 하긴 마찬가지였다.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는 거였다. 나는 졸지에 내가 특별한 사람이 된 것처럼 느꼈고, 솔직하게 대답하는 게 특별한 풍토에서 여론조사는 무의미할 것을 점칠 수 밖에 없었다.

지금은 야당을 지지한다고 해서 남의 눈치가 보이거나 불이익을 당하는 시대는 확실하게 아니다. 그렇건만 모르는 사람이 불쑥 의중의 인물을 물었을 때, 솔직하게 대답하기를 꺼리거나 꼭 대답을 해야 할 경우라면,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주는 식으로 여당을 지지하는 것처럼 말해버리는 게 일부 온건한 야당성 유권자들의 못 말리는 버릇이다. 비열이나 애매모호라고 말하지 않고 굳이 버릇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게 어제 오늘에 비롯된 것이 아니라 멀리 이승만정권으로부터 군사정권을 거치면서, 야당을 비롯한 반체제인사가 극심한 탄압을 받아오는 걸 목격하면서 선량한 백성들이 어쩔 수 없이 가위 눌려온 악몽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툭하면 야당이나 반체제인사들에게 빨갱이 아니면 북을 이롭게 한다는 혐의를 걸어 박해하고 몰락시키는 작전을 씀으로써 정권을 유지해온 세월이 너무 길었다. 오죽해야 민주국가로 독립한 후 반세기동안 한 번도 선거로 권력을 내놓은 정권을 못 가져봤겠는가.

여당의 압도적 우위로 나타난 여론조사가 크게 빗나간 걸 단순히 조사기관이나 방송사의 잘못이나 망신으로 보기보다는 권력유지를 위해 못할 것이 없는 강력한 정부 밑에서 형성된 국민정서의 표출이라고 보는 것은 어떨까.

○최다기권의 의미

김영삼 정부가 확실하게 문민정부라는 것은, 그를 있게 한 군출신 전직대통령들을 줄줄이 감옥에 보내면서 확실하게 입증했지만 못할 것이 없는 강력한 정부라는 것은 역대정권보다 한 수 위다. 역대정권들이 온갖 혹독하고 야비한 권모술수로 야권인사를 탄압해 없애려 한데 비하여 그는 아무리 강철같은 반체제인사도 흡수함으로써, 그리고 야당이 할 일을 혼자 다 함으로써 무력하게 만들고 있다. 아무리 국민을 속 시원히 해준다 해도 견제세력이 없는 정권은 국민에게 공포감과 의혹을 불러 일으키게 마련이다. 김대통령이 한 일도 실은 정권교체였다. 그러나 정상적인 정권교체는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이룩한,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굴에 들어가는 식의 정권교체를 대물림해서는 안된다. 이왕이면 정식으로 정권이 교체될 수 있는 길을 터놓아야 한다.

가장 낮은 투표율, 따라서 가장 많은 기권자들, 그들은 결코 휴일날 놀러가기에 바쁜 경박한 무의식대중이 아니라 헷갈리는데 넌더리가 나서 단호하고 쓸쓸하게 자신의 투표권을 보류한 이상주의자들인지도 모른다. 차기 대권주자들은 그들의 수를 가볍게 보지 말기를 바란다.<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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