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총선의 뜻이 무엇인지 묻자판문점에서 북한군이 갑자기 중화기 진지를 만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4·11 총선이 몇 밤 앞으로 바짝 다가온 일요일 초저녁, 서울의 정당연설회장 두 곳을 찾아간다. 하나는 강남 갑 선거구의 신한국당 연설회, 다른 하나는 종로 선거구의 새정치국민회의 연설회. 두 곳 모두 「정치 1번지」의 명성을 다투는 소문난 지역이고, 그만큼 정치적 상징성이 크고 중요하다. 후보 당사자는 물론이고 후보자가 소속한 정당들이 더욱 사활을 거는 듯한 분위기를 드러내는 곳이다.
해가 아직 남아있는 늦은 오후의 백화점 앞 대로변, 신한국당 연설회는 빌딩숲 찬바람 속에 청중을 부른다. 태진아, 임채무, 김자옥, 배한성 등 낯익고 귀에 익은 연예인 운동원들이 흥을 돋운다. 시국이 아무리 어수선하고 날씨가 변덕스러워 온몸이 떨려와도, 선거유세장의 본령은 역시 밴드왜건의 흥겨움에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가서 보고 듣고, 게다가 즐거움과 카타르시스를 체험할 수 있게 한다면 그 선거유세는 성공작이다. 일방통행식의 각박하고 살벌한 구호로 귀를 멍멍하게하기 보다는 함께 참여를 유도하고 환호로 응답하게 하는 유세장면이 모양도 훨씬 좋을 것이다.
연호속에 등장한 여당의 선대위의장은 『앞으로 1년6개월간 김대통령이 나라를 이끌고 가는 것은 이미 정해진 일이므로, 그로 하여금 못다한 개혁이나 부족한 부분, 국민에게 폐끼친 일들을 보완하고 바로잡을 수 있게 하도록 여당에 표를 몰아줘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는 「유세는 목소리와 발을 혹사하는 중노동」이라는 탄식으로 청중의 웃음을 이끌어 냈고, 뒤이어 등단한 상위순번의 한 전국구후보는 『전국구 21번인 박동지를 당선되게 하려면 여러분이 압도적으로 신한국당을 지지해 줘야 한다』는 호소로 박수를 유도한다.
국민회의 연설회는 밤8시로 예고되었으나 서민층 밀집지역의 초등학교 운동장은 1시간 전인데도 고성능확성기가 사자후를 토해냈다. 빌딩숲 대로변의 연설회장과는 전혀 다른, 어딘가 익숙한 분위기. 대학교수에서 갑자기 전국구후보가 된 찬조연사는 국민회의가 왜 「1백석 이상」을 차지해야 하는지를 설득한다. 조명, 배경막, 음향 등 무대장치와 운동장 한편의 멀티비전 차량 등이 잘 준비된 유세장이다.
연설회의 하이라이트는 이 정당 총재의 등장. 트럭을 개조한 무개차에 올라 두손을 흔들며 운동장을 가로 지르는데 조명과 행진곡, 불꽃 쏘아올리기 등이 정신을 뺄 정도로 화려하다. 연설회장은 단연 축제분위기로 연출된다.
총체적 실패론, 경제위기론, 여당견제론, 장학로사건론, 대선자금론 등 잘 알려진 공격적 연설에 이어 총재는 사회복지정책에 대한 관심을 피력한다.
『지난 대선때 김대통령이 「이렇게 쓰다가는 나라 망하겠다」고 스스로 토로한 일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걸 밝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자면 의석이 3분의 1은 돼야 하고…』
어둡고 추운 운동장에서 운동원들과 지지자들과 보통의 유권자들이 뒤섞인 청중들은 박수를 치고 환호를 보내고 연설내용을 말없이 경청하기도 한다. 정부공격을 들으면서 대리만족을 경험하는 청중도 없지는 않지만, 이 연설회장과 저 연설회장을 통틀어 아쉬운 공통점은 정략이 아닌 정책의 제시, 21세기 통일시대를 향한 비전과 물음을 듣고 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4·11총선이 왜 중요한 선거인가, 4·11총선에서 우리가 무엇을 이루어야 하는가를 유권자가 스스로 묻고 결단할 수 있도록 돕는 성숙한 진지함, 그런 진정성이 몸에 와 닿아야 하는데 그런 느낌이 오지를 않는 것이다.
결단의 때는 이틀 앞으로 다가섰다. 유권자가 역사 앞에 마주 설수밖에 없다. 과감히 질문하고 답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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