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40번째 신문의 날을 맞는 우리의 감회는 여느 때와 다르다. 이 날이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이 세상에 나온 지 1백주년이 되는 날이면서, 전란과 격동의 한 세기를 마감하고 21세기 정보화시대의 혁신적 신문을 준비해야 할 시점임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56년 6·25 전란의 여진이 아직 가라앉지 않은 폐허 속에서 신문인들은 독립신문 창간 60주년을 기념하여 그 창간일인 4월7일을 「신문의 날」로 정하고, 해마다 신문인의 사명과 각오를 새롭게 다짐하는 날로 삼아 왔다. 그러나 그 후 자유당 정권과 4·19, 군사독재와 문민정부를 거치는 40년동안 신문은 해마다의 다짐이 부질없다 할 만큼 무수히 상처받아 왔다.
그 간난과 질곡은 1백년전 독립신문의 탄생과 일제탄압 속에서의 생존에서부터 일찍이 예정돼 있었던 것인지 모른다. 「인민을 위해 무슨 일이든지 대변자가 되고 정부가 하는 일을 백성에 전하며, 백성의 정세를 정부에 알릴 것과 부정·부패·탐관오리를 고발하리라」던 독립신문은 한말 수구파의 압력에 못 이겨 3년8개월만에 문을 닫았고, 일제강점기에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민족계 신문들도 2차대전을 전후해 수난을 면할 수 없었다.
광복후 고난 속에서도 신문은 살아 남아 견제와 계도의 기능을 수행해 내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경제성장과 함께 인쇄·편집기술의 발전과 양적 팽창도 뒤따랐다. 군사독재시절 신문의 족쇄가 됐던 「언론기본법」이 88년 「정기간행물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로 바뀌면서 신문은 오늘과 같은 무한 경쟁시대로 변화했다. 당시 28개에 불과하던 일간지 수가 1백13개로 5배 가까이 늘었고 신문사에서 일하는 사람도 80년의 2배인 2만2천여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사회를 이끌어 가는 한 축으로서의 신문의 질이 그 양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 또한 오늘의 신문인 모두가 자괴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다. 그것은 올해 근대신문 1백주년을 기념하는 신문주간의 표어가 「자유로운 언론, 책임 있는 신문」인 데서도 잘 나타난다. 그 표어야말로 자유경쟁시대가 개막된 지 8년이 지났는데도 우리 신문들은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며 무책임하다는 고백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자유롭고 책임 있는 신문으로서의 질적 개혁과 더불어 오늘의 우리에게는 21세기 뉴미디어시대의 혁신적 환경변화에 대응해 신문의 위상을 새롭게 정립할 책무도 함께 지워져 있다. 신문의 권위는 정직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어떤 환경의 변화 속에서도 신문이 독자 앞에 바로 서는 길은 정직한 보도임을 다시 한번 다짐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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