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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굴곡만큼「알권리 수호」도 험난/한국신문,발전과 수난의 1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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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굴곡만큼「알권리 수호」도 험난/한국신문,발전과 수난의 1세기

입력
1996.04.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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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1910년 기점 민족지 억압 35년간 친일강요/해방공간 자유만끽… 5·16후 군사독재하 암흑기/80년초 언론통폐합 거쳐 90년대 무한경쟁시대로한국신문은 일제강점, 해방과 분단, 한국전쟁, 4·19혁명과 5·16쿠데타, 군부독재 30년에 이은 문민정부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영광보다 오욕으로 점철된 한 세기의 역사를 기록해왔다. 한국 최초의 신문은 1883년 10월31일 창간된 한성순보이지만 일종의 관보였다. 민간인이 운영주체가 된 신문은 한성순보보다 12년여 늦게 태어난 독립신문이 처음이었다.

언론사를 전공한 정진석 한국외대교수는 우리 신문의 발전을 10단계로 구분한다. 해방이전은 ▲근대신문 출현(1883∼1895) ▲민간지 성장(1896∼1904) ▲민족지와 친일지의 대립(1905∼1909) ▲친일지의 독점(1910∼1919) ▲민간지의 재생과 항일(1920∼1930) ▲친일 강요기(1931∼1944) 등으로 나뉜다. 해방이후는 ▲좌·우익지의 대립(45∼49) ▲반독재투쟁기(50∼59) ▲자유과잉기(60∼61) ▲언론에 대한 강력한 통제기(62∼87) 등이다.

1898년 창간된 한글전용의 제국신문과 국한문혼용의 황성신문은 독립신문 폐간이후 1910년 국권이 강탈될 때까지 민족의 소리를 대변했다. 1907년 7월 이완용내각의 법률 제1호로 공포된 광무신문지법은 체계적 언론통제를 가능케 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한국인이 발행하는 신문은 자취를 감추게 된다. 1919년 3·1독립운동을 계기로 이듬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창간됐으나 일제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통제를 강화했고 40년 8월 두 신문은 폐간됐다.

해방공간에서는 좌우익 등 여러 정파의 많은 신문이 쏟아져 나왔다. 한글제호 아래 「상업주의」를 표방하고 54년 6월9일 태어난 한국일보는 신문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 계기가 됐다고 언론학계는 평가하고 있다. 그뒤 우리 신문은 4·19혁명으로 집권한 민주당정권 아래서 언론의 자유를 누렸으나 5·16쿠데타이후 93년 문민정부의 출범전까지 30여년간 군사독재와의 긴 투쟁기를 거쳐야 했다. 쿠데타직후 군사정부는 포고령 제11호를 공포, 일부 신문을 제외하고 모두 등록을 취소했다. 이 시기에 신문은 권력에 굴복하거나 저항하면서 국민의 알 권리 확보를 위해 노력했다. 박정희대통령이 이끈 공화당과 유신독재시절 인권유보를 전제로 한 강력한 경제개발정책에 따라 국가경제규모가 커지면서 언론산업도 성장의 계기를 맞이한다. 정부는 언론에 「당근과 채찍」정책을 번갈아 펴면서 재갈을 물렸다.

80년 전두환정권은 언론통폐합조치를 필두로 과격한 통제를 감행했다. 이 때 서울경제신문 등 많은 신문과 방송이 통·폐합됐다. 5공체제의 언론은 통·폐합으로 빚어진 과점의 심화와 정부의 특혜를 발판으로 성장을 거듭했다고 비판받기도 한다.

88년 6공 출범과 더불어 「언론기본법」이 「정기간행물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로 대체되면서 발행과 편집의 자유가 크게 신장, 새로운 신문이 많이 나타났다. 언론환경이 변하면서 신문은 무한궤도의 경쟁시대에 돌입하게 된 것이다.<조재우 기자>

◎호외 100연사/「을사륵약」서 「전 전 대통령 구속」까지/1896년 매킨리 미대통령당선 영문 첫 발행/한국전쟁∼70년대초 연20∼30회 격동반영

「을사늑약」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 구속」까지. 신문의 호외를 장식한 사건들이다. 100년동안 발행된 호외에는 숨가쁜 파란과 격동의 근·현대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국신문사상 최초의 호외는 1896년 11월4일에 영문으로 발행됐다. 독립신문이 제25대 미국대통령에 윌리엄 매킨리가 당선됐다는 내용을 영문 1페이지에 담아 호외로 낸 것이다. 대한매일신보는 1905년 11월17일자에 고종이 을사늑약체결을 강력히 거부했다는 내용의 호외를 낸데 이어 11월27일자에 황성신문에 실린 장지연의 논설 「시일야방성대곡」을 영문으로 번역, 호외를 냈다. 이 호외는 일본에서 발행되던 영자지「저팬 크로니클(Japan Chronicle)」에 게재돼 일제의 조선침탈에 대해 국제사회의 여론을 환기시켰다.

일제강점기에는 극심한 탄압으로 신문의 휴·정간이 이어져 호외발행 역시 제약을 받았다. 한국전쟁 중에는 전황을 신속하게 알리는 진중신문 형태의 호외가 중심을 이뤘다. TV시대가 도래하기 전인 70년대초까지는 호외의 황금기였다. 매년 20∼30회가 쏟아질 정도로 호외는 격동의 시대상을 반영했다. 60년 4·19혁명, 이듬해 5·16쿠데타를 거쳐 3선개헌파동(69년 9월14일), 7·4남북공동성명(72년 7월4일), 최초의 남북적십자회담 평양개최(72년 8월30일)등은 호외를 통해 신속하게 보도됐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79년 10월26일), 정승화 육참총장의 연행조사로 비롯된 12·12사태, 80년 5·17과 광주민주화운동, 최규하 대통령 하야도 호외로 전달됐다.

호외는 한국일보에 의해 새 전기를 맞게 된다. 83년 7월5일부터 이듬해 1월31일까지 6개월여간 총 670호의 이산가족찾기 명단호외가 발행됐고 91년 8월19일 구소련 쿠데타발생 호외는 국내 최초로 서울 외에 부산 대구 창원 마산등 지방에도 배포돼 호외 전국발행시대를 열기도 했다.

최근에는 성수대교 붕괴, 대구 가스폭발, 삼풍백화점 붕괴가 호외로 보도됐다. 가장 최근의 호외는 전두환전대통령구속(95년 12월3일)이었다.<이상연 기자>

◎한국일보의 등장/“상업주의 기치” 언론계 신선한 충격/첫 견습기자공채·최대 해외취재망 등 개척주도

54년 6월9일은 한국언론사에 새 지평을 연 날이다. 한국일보는 이날 「신문은 누구도 이용할 수 없다」는 미래지향적 언론상을 제시하면서 창간호를 냈다. 한국전쟁의 후유증으로 혼란을 겪던 시대에 한글제호에 상업주의를 내세운 한국일보의 탄생은 언론계에 신선한 충격이었다.

한국일보가 국내 언론사상 처음 정착시킨 견습기자공채는 상업주의와 함께 한국신문 발전을 선도해온 원동력이 됐다. 한국일보가 표방한 상업주의는 이윤추구만을 목표로 하는 천민자본주의적 의미와는 반대되는 개념이다.

창간사설은 「세력과 탐욕에 동요되지 않는 철석같은 신문의 독립성은 경제적 기반 위에서만 이룰 수 있는 것이며 신문의 질적 향상 또한 그 기업적 자활로 이루어진다는 신념을 새롭게 한다」고 상업주의의 의미를 설명했다.

한국일보의 도전과 개척정신은 「춘추필법의 정신, 정정당당한 보도, 불편불당의 자세」라는 사시로 구체화했다. 한국일보는 평기자와 데스크, 그리고 논설진의 시각과 견해가 활력있게 펼쳐지는 지면, 보수와 진보가 정당성을 갖고 당당하게 부딪치는 지면, 공동체의 이익과 개인의 자유에 대한 공정한 자세를 지키려는 지면이 공존한다.

또 국제화·세계화를 선도한 신문답게 미주 구주 아주본사외에 전세계에 15개지국 35개 지사망을 확보하고 일본 도쿄(동경), 미국 워싱턴 뉴욕 로스앤젤레스, 프랑스 파리, 러시아 모스크바, 중국 북경(베이징)에 상주특파원을 파견하는 등 국내 언론사 가운데 최대의 해외취재망을 가동하고 있다.

통일의 염원을 안고 달리는 부산―서울 대역전경주대회, 고교야구 열풍의 주역 봉황대기 , 미스코리아선발대회, 남북 이산가족찾기, 지방공장 건설에 의한 전국동시인쇄 선도, 월요일자 발행도 한국일보의 도전과 개척정신을 말해준다.<박천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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